릴케를 품은 사람은 그렇게 살아냈다

릴케를 품고,삶으로 번역한 사람

by 최국만


아내는 대학에서 독어독문학을 전공했다.

어릴 적 꿈은 문학가였다.

글쓰기를 좋아해 고등학교 2학년 때 이미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독문학을 선택한 이유도 분명했다.

릴케를 제대로 읽고 싶었고,

가능하다면 독일로 유학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은 늘 계획보다 먼저 사람을 데려온다.


나는 대학 3학년,

아내는 1학년이던 시절

대학 교지편집실에서 편집장과 편집위원으로 만났다.

글을 사랑하는 사람 특유의 눈빛을

그때 이미 알아보았던 것 같다.




지금도 볕이 좋은 날

우리 집 북카페에 앉아 있으면

아내는 가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릴케를 연구하려고

정말 독일에 가고 싶었어.

그땐 열심히 공부했거든….”


말끝은 늘 조용히 사라진다.

미련이라기보다는

한 사람의 인생에 남아 있는

가장 아름다운 문장처럼.




결혼을 하고 아이 셋을 낳았다.

연년생이었다.

나는 그 시절,

‘여자가 집에 있으면서 살림하고 아이 키우는 게

뭐가 그렇게 힘들까’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외향적이고 사회적인 아내에게

집과 아이만으로 이루어진 하루는

너무 길고 조용했을 것이다.


어느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대학에서 독문학 공부할 때는 참 재미있었는데

지금은 내가 쓸 데가 없는 사람 같아.

대학원에 가서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싶어.”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이야기다.

그때 사회복지라는 말은

지금처럼 존중받는 분야가 아니었다.


“그거 해서 뭐 해?”

“차라리 다른 자격증을 따지.”


그런 말들이 자연스럽던 시절이었다.




나는 현실을 말했다.


“막내가 아직 초등학교 2학년이잖아.

조금만 더 있다가 가면 어때.”


이 대화는 가족회의처럼 이어졌다.

아이들도 함께 듣고 있었다.


그때 막내가 말했다.


“아빠, 나 괜찮아.

엄마가 학교 가기 전에 간식만 준비해주면

나 혼자서도 잘할 수 있어.

엄마 학교 다녀.”


그 말 한마디가

한 사람의 인생을 다시 움직이게 했다.




아내의 하루는

집에만 있을 때보다 더 바빠졌다.


살림도, 아이도, 공부도

어느 하나 느슨해지지 않았다.

리포트는 밤을 새워 쓰고

세미나는 빠짐없이 다녔다.


내가 방송 있는 날이면

새벽에 먼저 일어나

와이셔츠를 다려 놓았다.


잠깐 스쳐보아도

아내는 늘

1인 3역, 4역을 살아내고 있었다.


“여보,

이번에 교수님들이랑 워크숍 가는데

1박 2일이야.

밥은 다 준비해놓고 갈게.”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차라리 야간대학을 다니면

덜 힘들 텐데…’


그런데 아내는

힘들다는 말을 거의 하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에너지는

의무가 아니라

자기 삶을 다시 찾고 있다는

확신에서 나왔던 것 같다.




방송국 입사 8년 차.

급여가 적은 편은 아니었지만

아이 셋에

아내의 대학원 학비까지 감당하기엔

넉넉하지 않았다.


그때 아내가 말했다.


“여보,

나 이번 학기 장학금 받았어.”


대학원에도 장학금이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아마 정말

많이 공부했을 것이다.




4학기를 우수한 성적으로 마친 아내는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들고

새로운 삶으로 들어갔다.


그 길을

무려 27년이나 걸었다.


사회복지의 최전선에서

우리 사회의 약자와 아픔을

곁에서 함께 견뎠다.


졸업식 날,

아내가 말했다.


“여보, 고마워.

이제 내가 할 일을 찾은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당신 대단해.

대학 때 교지편집실에서부터

이미 알아봤어.

그 집념을.”


그러자 아내가 웃으며 말했다.


“이제 나는 졸업했으니까

당신도 공부해봐.

환경 취재 잘하잖아.

환경 쪽 대학원 가봐.”




그렇게 나는

50대에 다시 학생이 되었다.


돌아보면

아내는

자기 꿈을 완전히 버린 적이 없다.


릴케를 독일에서 연구하지는 못했지만

사람의 삶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읽어낸

또 다른 문학을 살아냈다.


나는 그 곁에서

그 삶을 지켜본

가장 오랜 독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