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는 바다에 들어갔고, 나는 유럽에 있었다

내 자리를 대신 살아준 아내에 대한 뒤늦은 고백

by 최국만


오늘은 하이델베르크로 이동하는 날이었다.

유럽 전역이 폭염에 잠겼고, 독일의 여름은 상상 이상이었다.

연일 40도에 가까운 더위.

거리 취재는 물론, 카메라를 들고 서 있는 것조차 버거운 날씨였다.


마인츠 취재를 마치고 숙소 침대에 앉아

다음 도시에서 만날 인터뷰이의 이력을 다시 정리하고 있었다.

하루를 마무리하고 막 누우려는 순간, 휴대폰이 울렸다.

밤 10시.


아내였다.

해외 취재 중일 때 아내는 웬만하면 연락하지 않는다.

“일에 방해될까 봐.”

그게 늘 그녀의 방식이었다.


그래서 더 이상했다.


한국은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여보, 취재 잘하고 있어요?

나 아이들 데리고 대천해수욕장 왔어요.”


순간, 더위에 지쳐 있던 내 몸 어딘가가 툭 하고 무너졌다.


나는 늘 현장에 있었고,


아내는 늘 아이들 곁에 있었다


직장인들에게 여름은 휴가 계획의 계절이다.

그러나 시사 프로그램을 맡은 방송인에게 여름은

오히려 더 바쁜 계절이었다.


나는 늘 현장에 있었다.

사건이 터지면 달려가야 했고,

프로그램이 돌아가려면 자리를 비울 수 없었다.


누군가 대신 진행해도 되는 자리였지만

나는 끝내 자리를 비우지 못했다.


그 사이,

아내는 단 한 번도

“왜 우리 가족은 휴가도 제대로 못 가?”라고 묻지 않았다.


대신,

그녀가 아빠 역할까지 맡았다.


우리 아이들의 자연 선생님은 엄마였다


아내는 도시에서 자랐지만

어린 시절을 시골 할머니 댁에서 많이 보냈다.

그래서였을까.

아이들에게 자연을 가르치는 일에 주저함이 없었다.


아이들이 어릴 때 했던 말이 아직도 기억난다.


“아빠, 아빠 없을 때

엄마가 뱀 잡아서 보여줬어.”


나는 밀렵 취재를 하며 수없이 많은 뱀을 봤다.

올무에 걸린 동물, 그물에 묶인 생명들…

그래서 뱀은 나에게 늘 고통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아내는

아이들 앞에서 뱀의 목을 조심히 잡고

“무서워할 필요 없어, 얘도 우리랑 같이 사는 생명이야”라고

설명해 주었다고 했다.


송충이도, 나비도, 곤충도

아이들 손 위에 올려주며 말해 주었다.


자연은 교과서가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세계라는 것을.


나는 카메라로 세상을 기록했고

아내는 아이들의 마음속에 세상을 심고 있었다.


나는 세상을 가르쳤고,


아내는 삶을 가르쳤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가르친 건 공부가 아니었다.


은행 가는 법

도장 만드는 법

ATM 쓰는 법

낯선 어른 앞에서 말하는 법

혼자 책상에 앉아 공부하는 법


“세상에서 혼자 설 수 있는 법”을

아내는 생활 속에서 가르쳤다.


나는 세상의 부조리를 고발했지만

아내는 아이들이 세상을 견딜 힘을 길러주었다.




휴대폰에서 들었던 아내의 말 한마디.

“ 여기, 대천이야”


내 인생을 다시 보게 했다


“여보, 대천까지 멀잖아. 어떻게 갔어?”

“다들 아빠랑 피서 간다는데, 우리 애들도 가고 싶어 해서 왔지.

걱정 마, 1박 하고 갈게.”


그 말이 이상하게 오래 남았다.


나는 늘

가족을 위해 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날 깨달았다.


가족을 지킨 건

늘 아내였다는 걸.


엄마와 딸은


서로를 닮아가는 시계 톱니바퀴 같다


지금 딸들은 입을 모아 말한다.


“우리 엄마는 진짜 대단해.”


그 말속에는

존경이 있고

감사가 있고

사랑이 있다.


아내가 아이들에게 건넨 사랑은

이제 딸들의 마음속에서

다시 아내를 향해 돌아오고 있다.


마치 시계 톱니바퀴처럼

서로 맞물려 돌면서.


나는 하이델베르크로 향했고


아내는 바다에 서 있었다


유럽의 폭염 속에서

나는 인쇄문화의 도시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창밖으로 낯선 풍경이 흘러갔지만

머릿속에는 한국의 바다가 출렁였다.


아이들과 물장구치며 웃고 있을 아내 모습.


그 휴대폰을 받은 이후로

내 취재 수첩 한쪽에는

늘 이런 문장이 함께 적히기 시작했다.


“세상을 기록하는 동안

내 삶을 지켜준 사람에게 감사하자.”


그 사람은

언제나 조용했고,

늘 내 뒤에 있었고,

한 번도 생색내지 않았다.


그래서

더 위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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