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아내는 레이를 기다린다
괴산의 밤은 깊다.
가로등 몇 개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어둠이다.
그 어둠을 밝히는 존재들이 있다.
마당을 지키는 뭉게 와 별이.
밤을 점잖게 걸어 다니는 신사, 레이와 아롱이.
우리는 귀촌 이후 14년째
개와 고양이와 함께 살고 있다.
아롱이와 뭉개는 그 시간의 처음을 함께 견딘 아이들이다.
작고 못생겨 더 사랑스러운 시추 믹스견 뭉개는
내가 혼내는 흉내만 내도 눈을 크게 뜨고 나를 바라본다.
그 눈빛은 늘 나를 먼저 풀어놓는다.
고양이 아롱이는 암컷이다.
아내는 아롱이가 외롭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늘 어린 수컷을 데려왔다.
처음에는 하악질을 하던 아롱이는
며칠이 지나면 조용히 자리를 내주었다.
함께 자도록 허락했다.
하지만 성묘가 되면
그 아이들은 하나둘 떠났다.
“구름 이가 안 들어오네.”
“호식이도 안 보이네.”
“망고도… 다람쥐도…”
들어오는 순간은 모르지만
나가는 순간은 안다.
사랑은 붙잡는 일이 아니라
기다리는 일이라는 걸
그때 배웠다.
레이는 4년 전 추석 전날 우리 집에 왔다.
몸통이 손바닥만 했고
흰 털은 갓 빨아 널어둔 천처럼 맑았다.
소리는 너무 작아서
“남자가 목소리가 커야지” 하고 웃으며 말하곤 했다.
아내는 레이를 위해 작은 집을 만들었다.
풍선을 달고 바람개비를 세웠다.
시간만 나면 북카페 뒤로 가
레이를 안고 속삭였다.
“여기가 네 집이야.
아롱이를 엄마로 삼고
이 산을 네 놀이터로 써.”
아내의 동물 사랑은 말이 아니라 손이었다.
교통사고로 머리가 깨진 고양이를
직접 안고 와 살려낸 사람이다.
밤새 수건을 갈아주고
밥을 잘게 찢어 먹였다.
그리고 다시 그 자리로 돌려보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회복이라는 걸
아내는 알고 있었다.
한 달 전, 레이가 나갔다.
아내는 기억한다.
도서관에 가기 전
레이의 코끝에 작은 피가 묻어 있었다고.
살코기를 잘게 찢어 주고
“다녀올게” 하고 나선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날 이후
레이는 돌아오지 않았다.
밤이 되면
아내는 마당을 오래 바라본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이 추위에 어디에 있을까.
먹을 것은 먹고 있을까.
혹시 길 위에서 외롭게
무지개다리를 건넌 것은 아닐까.
출근길에 흰 고양이만 보여도
우리는 걸음을 멈춘다.
“레이인가?”
그리고 이내 고개를 젓는다.
기다림은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이다.
우리는 레이를 부르지 않는다.
붙잡지도 않는다.
다만 마음속에 자리를 비워둔다.
어디에 있든
행복하게 살아 있다면 좋겠다.
이 집을 떠난 이유가 있다면
그 이유를 존중하고 싶다.
그래도.
괴산의 밤이 깊어질 때마다
아내는 작은 소리를 기다린다.
야옹,
하고.
그 소리가 들리면
가장 먼저 문을 열 사람은
나보다 아내일 것이다.
우리는
그날까지 기다릴 것이다.
레이야! 제발 죽지 말고 살아만 있어라
사랑스런 우리 레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