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사랑은 왜 더 깊어지는가
정리하려고 꺼낸 서류 더미 속에서
시간이 멈춘 종이 두 장을 발견했다.
1988년 11월 26일.
내 이름과
아내의 이름이
처음으로 한 문장 안에 들어간 날.
혼인서약서였다.
“네.”
그 한마디로 시작된 인생
그날은 참 추웠다.
사실 나는
무슨 말을 들었는지 기억이 없다.
주례의 목소리도,
서약의 문장도
하나도 또렷하지 않다.
그저
내 옆에 서 있던
그 어린 신부가 고마워서
나는 힘주어 말했다.
“네.”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사랑의 대답이기도 했지만,
세상에 대한 선언이기도 했다.
가난했지만
함께라면 괜찮다고 믿었던
젊은 날의 무모한 용기.
그런데, 나는 얼마나 지켰을까
서약서는
놀랍도록 깨끗했다.
마치
어제 인쇄한 것처럼.
그런데 이상하게도
내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
나는 늘 밖으로 향해 있었다.
일이 먼저였고,
꿈이 먼저였고,
세상이 먼저였다.
그 사이에서
가정은
아내 혼자 지켜내고 있었다.
20년이 아니라
거의 평생을.
우리는 사랑이 아니라
버팀으로 살았다
결혼식 사진 속 아내는
너무도 어렸다.
지금 내 옆에 앉아 있는 아내는
조용히 늙어 있다.
그 얼굴에는
시간이 새겨져 있고,
그 눈에는
살아낸 사람만이 가지는
단단함이 있다.
나는 그걸 이제야 안다.
우리는
사랑만으로 산 것이 아니라
서로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으로
버티며 살았다는 것을.
남은 시간은
생각보다 짧다
요즘 자주 그런 생각이 든다.
앞으로의 시간은
과거보다 훨씬 빠르게 지나갈 것이라는 것.
어쩌면
우리에게 남은 시간은
‘찰나’ 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고 싶다.
더 늦기 전에
조금 더 가까이에서
조금 더 자주
조금 더 따뜻하게.
이제야, 나는 서약을 이해한다
아내의 손을 잡는다.
예전처럼 부드럽지는 않다.
대신
삶이 묻어 있다.
그 손이
나에게는
세상 어떤 보석보다 귀하다.
그래서 말한다.
미안했다고.
그리고
고맙다고.
사랑은
젊을 때보다 늙어서 더 선명해진다
젊은 날의 사랑은
뜨겁다.
하지만
노년의 사랑은
깊다.
불꽃은 사라졌지만
그 자리에 남은 것은
쉽게 꺼지지 않는 온기다.
우리는 잘 살았다
서약서는 늙지 않는다.
하지만
사람은 늙는다.
그래서 더 애틋하다.
버리려던 종이 한 장이
나에게 말해준다.
“당신들,
그래도 잘 살아왔다.”
다시, 대답한다
1988년의 나는
큰 소리로 말했다.
“네!”
지금의 나는
조용히 말한다.
손을 잡으며,
눈을 마주 보며,
같이 밥을 먹으며.
“그래.
지금도,
나는 당신과 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