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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도착한 마지막 월급봉투

30년의 방송 인생이 건넨 작별 인사,숫자가 아닌 그 안에 담긴 이야기

by 최국만

65세.

기초연금 수급 대상 대상자로 선정되었다는 통보서를 받아든 순간,나는 묘한 정적 속에 잠시 앉아 있었다.

기뻐해야 할지,감정의 실마리를 붙잡기조차 어려웠다.

그 종이 한 장은 단지 행정적인 통지가 아니라,내게는 인생의 하나의 장이 끝났음을 조용히 알리는 책갈피 같았다.


돌이켜보면 ,나는 꽤 먼 길을 걸어왔다.

소년 시절,학교 대신 공장으로 향했던 발걸음.

기계 소음 속에서 하루하루 삶의 끈을 부여잡으며,야간고등학교 대신 검정고시를 택했고,고단한 노동 속에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맨홀 안에서 ,덜덜 떨며 식은 빵을 먹다 흘린 눈물은 ,내가 인간으로 살아야겠다고 다짐한 최초의 서약이었다.


그리고 나는,불합격의 고배를 마신 사관학교 입시와,학력고사를 준비하며 화장실 옆에 만든 작은 공부방의 적막한 밤들을 지나,마침내 대학에 들어섰다.

그 후 ,기자가 아닌 방송 PD로 살아가며,밀렵의 현장과 사회의 어두운 이면을 파헤치고, 시청자들의 뇌리에 남을 프로그램을 만들기 위해 심장을 태우듯 시간을 썼다.

카메라를 분해해 중국의 밀렵 현장을 촬영하고,쓸개즙을 뽑히는 반달곰의 눈망울 앞에서 숨죽이며 사명을 다했던 순간들

그것은 단순한 직업이 아닌 삶의 신념이었다.


그런 지난 시간들이,어느새 ‘기초연금 수급자‘라는 단어 앞에 멈춰 서 있는 것이다.

나는 늙었고,사회는 그 늙음을 국가의 책임 일부로 받아들인 것이다.

이제 나의 노동은 끝났고,수입이 아닌 수급의 자리에 놓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돈을 단순한 ‘보조금‘으로 여기지 않는다.

이것은 ,내가 성실히 살아왔다는 증거이며,사회가 내게 건네는 마지막 월급봉투와 같다.

그 봉투에는 젊은 날의 열정,땀,분노,그리고 사랑이 차곡차곡 담겨있다.

나는 이제 ,그 돈으로 아내와 함께 조용한 삶을 살아간다.


내 아내는 27년의 세월을 직장에 바쳤고 ,새벽 같이 일어나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며 한 번도 불평하지 않았다.

요양원장 때는 입원한 노인을 친부모처럼 보살폈고,관공서에서도 성실히 일했으며,아이들에게는 단 한 번도 고함도 없이 사랑으로 가르쳤다.

나는,그런 아내와 함께 밥을 짓고,산책을 하고,계절을 느끼며,책을 읽는 평범한 날들이야말로 가장 값진 축복이라 여긴다.

기초연금이라는 이름의 이 작고 조용한 돈은,바로 그 일상에 꽃을 피우는 거름이 된다.


철학자 카뮈는 말했다.

“늙는다는 것은 영혼이 육체를 다 채우지 못하고 넘쳐 흐르는 일이다“

이제 나는 나의 남은 시간을 ,젊은 날에 담지 못했던 생각들로 채우고 있다.

삶이란 무엇인가.

노년이란 무엇인가.

돈을 번다는 것과 받는다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가.

그 질문 속에서 나는 이전보다 더 겸허해졌고,더 인간적이 되었다.


이제 나의 하루는 빠르지 않다.

방송국에서 분초를 다투던 날들과 달리 ,아내와 나는 따뜻한 차 한 잔 ,반려견 두 마리와 고양이 두 마리가

내 곁에 머무는 평온한 아침이 나의 하루를 열어 준다.

그 위에 조용히 ,연금이 도착한다.

세상이라는 거대한 삶이 내게 주는 마지막 원고료이자,더 이상 누군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된다는 삶의 면허증 같다.


나는 이제 ‘받는 사람이’이 되었지만 ,여전히 내 삶을 ’쓰는 사람‘이고 싶다.

내 인생의 수필 첫 장을 이 작은 연금 봉투로 시작하는 것이 ,더없이 상징적이고 의미 깊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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