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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실 옆 공부방에서 피운 꿈

절망 끝에서 움튼 희망,그리고 나를 일으킨 책 한 권

by 최국만

그 방엔 창문도 ,희망도 없었다.

습기와 냄새,그리고 외로움까지 함께 깃든 그 블록 쌓은 방 안에서

나는 사과 박스로 만든 책상 하나,스탠드 하나,꿈 하나를 붙잡고 버텼다.


스무 곳 넘는 공장을 전전하다,

쇳물 앞에서 땀을 짜고,

솜틀공장에서 솜마저 무겁다고 느끼던 그 절망의 날들.

그 끝자락에서 나는 ‘이 방‘에 들어왔다.

누구도 알아주지 않았고,

세상은 나를 잊은 듯했지만

나는 포기하지 않았다.


화장실 옆,

그러나 내 인생에서는 가장 순결했던 공부방,

나는 그곳에서 꿈을 키웠다.


인생에는 누구에게나 잊히지 않는 방 하나쯤은 있다.

나에게도 그런 방이 있었다.

그곳은 방이라 부르기도 민망한 ,집 뒤편 화장실 옆에,

그것도 재래식 화장실 옆에 블록을 쌓아 만든 1평 남짓한 공간이었다.


문도 창도 없이,겨울이면 찬바람이 틈 사이로 스며들고,

여름이면 습기와 곰팡이 냄새가 눅진하게 깔리던 곳.

그러나 나는 그곳에서 인생을 바꾸는 공부를 했다.

1970년대 부모님이 하시던 주유소의 화재가 그토록 나의 삶을 처절하게 만들었다.


그 작은 공간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지지 않는 법을 배웠고,

인간으로 살아가기 위한 자존과 희망을 단련했다.


사관학교 시험에서 탈락한 후 ,나는 모든 것을 놓아버리고 싶었다.

그토록 바라던 길이 막혔을 때,

나는 술병 하나를 들고 산으로 올라가 하염없이 울었다.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마시면서.


다시 시작할 수 있을까,

내게 그런 힘이 남아 있을까.

그러나 삶은 항상 고비 끝에서 나를 밀어 붙였다.

직장을 그만두고 학력고사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은 그날,

나는 집에 조용히 돌아와

아무도 눈길 주지 않던 공간,

화장실 옆 그 자리에 블록을 나르기 시작했다.

집 안에는 공부할 방이 따로 없었다.


사람들은 그걸 미쳤다고 했고,어떤 이는 “저기서 냄새가 나는데,공부가 되겠냐“고 혀를 찼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었다.

모든 것은 마음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그곳에는 사과 박스로 만든 책상과 블록으로 높게 만든 의자가 전부였다.

나무 상자를 엎어 책을 놓고,

종이를 펼치고,삐걱대는 스탠드를 하나 구해 밤을 밝히며 외웠다.


영어 단어를 외우고,수학 문제를 풀고,하루치 진도를 마치면 찬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이 들었다.

난방도 안돼,겨울이면 얼음장이 되었고,

여름엔 파리가 들끓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그 방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방은 세상과 단절된 나만의 성소였고,

고요하게 꿈을 가꿀 수 있는 토굴 같았다.


때로는 외로움이 너무 커 견딜 수 없을 때도 물론 있었다.

부모는 바빴고,가족 누구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사랑 받지 못한다는 결핍은 차라리 분노로 바뀌었고,

그 분노는 내 공부의 연료가 되었다.


나는 이 현실에서 반드시 벗어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그 다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학력고사에서 원하는 성적을 받았고,

대학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당시에 나를 돌이켜보면,

참으로 가난했고,참으로 외로웠다.

그러나 그 가난과 외로움이야말로 나를 사람으로 만든 거름이었다.

공부가 단지 대학 입학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한 생존의 언어였던 시절.

나는 화장실 옆 공부방에서 그 언어를 배웠고,

그 언어로 내 인생을 번역해왔다.


지금 나는 괴산의 조용한 마을에서 아내와 함께 살고 있다.

방송국을 은퇴하고,사회를 향한 뜨거운 분노와 열정도 이제는 잔잔한 파도처럼

가라앉았다.

그러나 가끔 문득, 그 시절의 내가 떠오른다.

블록을 쌓으며 땀을 흘리던 내 모습,새벽녘 추위를 이기며 책장을 넘기던 손끝,


사과 박스 책상 위에서 하루를 버티던 나의 허리.

그리고 무엇보다도,단 한 번도 스스로를 포기하지 않았던 눈빛.

나는 그 작은 냄새나는 공부방에서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웠다.


그 방은 내게 가난한 신학교였고,

고요한 도서관이었으며,

세상을 향한 유일한 탈출구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피운 꿈은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나의 뿌리이자,

오늘을 살아가는 내 자존의 근거다.


지금도 어쩌다 힘겨운 날이 오면 나는 마음 속으로 그 방을 찾는다.

그곳에는 흔들리던 나를 붙잡아 주던 의지와,어둠 속에서도 끝내 꺼지지 않던

희망의 불빛이 있다.

그리고 나는 그때처럼 또 한 번 ,나 자신을 다잡는다.

“포기하지 마라.너는 화장실 옆에서도 공부하던 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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