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과 사람, 자연의 시간에 맞춰 다시 배우는 삶의 기술
귀촌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도시를 떠나 시골로 내려오면
모든 게 천천히 흘러갈 줄 알았다.
하지만 막상 도착해보니
모르는 것 투성이인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언제 물을 줘야 할지
비닐은 어떻게 씌우는지,
이웃과는 어디까지 거리를 둬야 하는지….
귀촌은 ‘은퇴‘ 가 아니라
또 한 번의 입학이었다.
삶을 다시 배우는, 작고도 큰 학교에 들어선 셈이었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상대를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말.
이 말은 전쟁터에서뿐 아니라, 도시에서 농촌으로 삶의 터전을 옮기는 이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귀촌도 하나의 ‘결단’이고, 때론 인생을 건 ‘도전’이다.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 자란 나는, 시골이 낯설었다.
어릴 적 방학이면 어쩌다 가보던 시골의 기억은, 추억이 아니라 다소 불편한 감각이었다. 맑은 공기, 소박한 밥상, 별이 쏟아지는 밤하늘은 아름다웠지만, 낮은 천장과 툇마루의 벌레들, 이른 새벽의 소 한 마리와 닭 울음은 도시의 감각으로는 버겁기도 했다.
그런 내가, 어느 날 문득 시골을 꿈꿨다.
마흔을 넘기고, 쉰을 지나고, 도시에서의 삶이 점점 팍팍해지고 회의가 밀려올 무렵이었다. 출퇴근의 전쟁, 점점 줄어드는 인간관계, 무기력한 하루하루.
그때, 텔레비전에서 보이는 푸른 들판과 소박한 시골집 풍경은, 꿈이자 탈출구처럼 다가왔다.
하지만 시골살이는, TV에서 보던 것처럼 낭만만은 아니었다.
‘고요한 자연 속에서 유유자적’이라는 상상은, 벌레떼, 쥐, 고라니, 멧돼지, 냉해와 폭염이라는 현실에 부딪히며 와르르 무너졌다.
“이걸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왜 이걸 모르고 왔을까?”
초기 귀촌자들이 하나둘 도시로 돌아가는 것을 보며, 나는 절실히 깨달았다.
귀촌은 ‘삶의 전환’이자 ‘공부의 시작’이라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50대 후반부터 60대 초반, 퇴직을 계기로 귀촌을 시도한다.
특히 한국전쟁 직후 태어난 베이비부머 세대는 대규모로 농촌으로 몰려들었다.
그러나 대부분이 1~2년을 버티지 못하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준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농촌의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복잡했고 고되었다.
해충과 작물병, 낯선 이웃과의 관계 맺기, 느린 행정, 외로움, 그리고 도시에서 익숙했던 편의시설의 부재까지.
무엇보다 마음이 준비되지 않았다. 도시인의 사고로, 도시인의 방식으로 시골에 똑같이 살려고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시간이 흐르며, 이제는 많은 지자체가 귀농·귀촌인을 위한 정책을 마련하고 있다.
‘한 달 살기’, ‘농촌 체험’, ‘귀촌학교’, ‘주거 지원 프로그램’ 등 체계적인 안착 프로그램이 늘고 있다. 하지만 제도가 아무리 좋아도, 내 안의 태도가 바뀌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귀촌은 ‘도피’가 아니다.
퇴직 후의 ‘보상’도 아니다.
귀촌은 새로운 생태계에 나를 던지는 일이며, 그 안에서 낮추고, 배우고, 섞이는 일이다.
나는 시골에 내려오기 전, 수년간 전국을 돌며 귀촌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성공한 사람들, 실패한 사람들, 그리고 아직도 부딪히며 살아가는 사람들.
그들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한 것이 있다.
“귀촌은 마음공부가 먼저야.”
공부하라.
자연을 이해하는 공부, 농업을 배우는 공부, 관계를 맺는 법에 대한 공부.
그리고 내 마음을 내려놓는 공부.
도시에서 내려와 살겠다고 마음먹은 이들이라면, 먼저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나는 과연 ‘불편함’과 ‘고독’, ‘느림’과 ‘타인의 개입’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었는가?
귀촌은 ‘선택’이지만, 동시에 ‘변화’다.
그러니 귀촌에도 공부가 필요하다.
시골은 낭만이 아닌, 나를 매일 새롭게 훈련시키는 학교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하루를 배우며,
나는 이제 안다.
시골의 자연이 내게 준 쉼과 평안이,
단지 땅과 공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배우고 나누고 함께하며 살아가는 이곳의 삶이,
결국 나를 다시 사람답게 만들어주는 것이란 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