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천천히 깨어나는 시골의 새벽, 그 고요 속에서 나를 만나다
아침이 오고 있었다
창문을 열었다.
서늘한 기운이 뺨을 스친다.
안개가 걷히는 들녘 너머로 붉은 기운이 살짝 번지고 있었다.
동네 개 짖는 소리에 이어 논두렁을 타고 날아오는 새들의 울음.
이곳 괴산에서 맞는 아침은 , 도시의 날카로운 알람 대신 자연이 불어주는 조용한 깨움이다.
나는 그 소리를 듣고, 바람의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커피를 내린다.
젊은 날,편집실에서 밤을 지새울 때 나는 생각했다.
‘아침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지금 나는 매일 아침이 고맙다.
살아있음에 오늘도 감사기도하고,오늘 하루가 또 시작된다는 사실이 기쁘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아니 이제 더 깊이 아침을 기다린다.
아내의 숨소리,개 짓는 소리,고양이의 작은 발소리,그리고 나의 기척마저 어루만지는 이 조용한
시골의 새벽이 좋다.
나는 여전히 아침이 반갑다
아침은 늘 나를 깨운다.
그것은 단순한 하루의 시작이 아니라, 나에게 주어진 새로운 존재의 확인이다.
내가 아직 숨 쉬고 있다는 사실,여전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아침의 빛을 통해 증명된다.
괴산의 아침은 도시의 아침과는 다르다.
새들의 울음,풀과 흙의 내음,먼 들녘에서 울리는 트랙터 소리.
이 모든 소리가 합해져 ‘오늘도 네가 여기에 있다’ 는 존재의 합창처럼 들린다.
니체가 말한 “아모르 파티(Amor Fati)” 운명을 사랑하라는 말처럼, 나는 이 아침을 사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젊은 날의 아침은 늘 전쟁 같았다.
사건을 쫓아다니며,고발 프로그램의 카메라 뒤에서 진실을 붙잡으려 애썼다.
그때 아침은 내가 감당해야 할 의무와 무게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이제의 아침은 다르다.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현존재(Dasein)”처럼,나는 단순히 살아 있음 자체를 사유하게 된다.
무엇을 성취할지가 아니라,그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선물인지를 깨닫는다.
아침은 나를 겸손하게 만든다.
나이 들어감은 곧 잃어감이다.
기억은 희미해지고,몸은 둔해지고,
가까운 이들의 부재는 늘어난다.그러나 바로 그 잃어감 속에서 아침은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오늘 하루가 마지막일 수 있다는 자각, 그럼에도 다시 눈을 뜰 수 있다는 기쁨.
그것이 아침의 철학이다.
불교에서 말하는 무상은 아침마다 새롭게 드러난다.
같은 마당,같은 창문일지라도 어제와 오늘의 아침은 결코 같을 수 없다.
끊임없이 변하는 세계 속에서 내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지금 이 순간,
내 앞에 놓인 빛뿐이다.
나는 여전히 아침이 반갑다.
아침은 단순한 하루를 여는 시간이 아니라,존재와 무상의 진리를 다시 배우게 하는 스승이다.
그리고 오늘의 아침은 나에게 이렇게 묻는다.
“너는 지금 이순간을 어떻게 살아낼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