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함께 걸었던 괴산의 능선, 이제 다시 그 산길에서 희망을 부른다
한때 우리는 자주 산에 올랐다.
괴산의 명산들, 칠보산, 속리산, 박달산, 군자산…
계절마다 옷을 바꿔 입는 그 산들이
우리를 품어주고, 우리 사이를 더 단단히 이어주곤 했다.
아내는 늘 앞장서서 걸었다.
나는 뒤에서 배낭을 지고,
그녀의 뒷모습을 따라 산길을 걸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내에게 암이 찾아왔다.
그 후로 우리는 한동안 산을 멈췄다.
괴산은 산과 물이 어우러진 고장이다.
사계절이 분명하고, 계곡과 숲길이 손때 묻지 않은 채 살아 숨 쉰다.
충북의 여러 군마다 각기 아름다움을 자랑하지만,
괴산처럼 산과 물이 한데 어우러진 풍경은 좀처럼 보기 어렵다.
그 대표적인 장소가 바로 산막이옛길이다.
괴산댐 둘레를 따라 이어진 이 길은
해를 거듭할수록 더욱 많은 이들의 발걸음을 이끈다.
한적하고 고요한 풍경 속에
자연의 질서와 사람의 걸음이 함께 흘러간다.
또한 화양계곡, 쌍곡계곡은 여름철마다
도시인들의 피로를 씻어주는 쉼터가 된다.
이런 명소들이 괴산을 ‘사계절 관광지’로 만들고 있지만,
우리는 무엇보다 산이 주는 품과 기운에 끌려
이곳에 정착한 이후, 괴산의 명산을 하나하나 오르기로 했다.
그 첫 번째 산이 바로 칠보산이었다.
우리 집에서 차로 20분이면 닿는 가까운 산.
속리산 국립공원 내 쌍곡계곡을 따라 올라가면 닿는 이 산은
사계절이 모두 그림 같고,
초입에 마주하는 용추폭포는 수풀과 어우러져 장관을 이룬다.
폭포 소리를 들으며 오르기 시작한 우리 부부는
산길에서 앞서거니 뒤서거니 걸으며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말없이 손을 내밀고,
돌부리에 넘어질까 조심조심 걷는 아내의 뒤를 따라
나는 처음으로, 산이 사람을 어떻게 다듬는지를 느꼈다.
도시에서 칠보산을 오르려면 청주에서 1시간 가까이 차를 몰고 와야 했다.
하지만 이제는 이 아름다운 경치를 ‘내 집 드나들 듯’ 누릴 수 있다는 호사가
우리 삶의 일상이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괴산이라는 땅에 충분히 감사하다.
우리 부부는 지금까지 틈나는 주말이면 산에 오르곤 했다.
정확히 말하면 ‘정복’이라기보다 그 산의 기운을 받았다고 말하고 싶다.
산은 정복의 대상이 아니라, 교감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정상에 올랐을 때 마시는 공기는 확연히 다르다.
숨을 들이킬 때마다 폐가 씻기는 듯한 맑음.
심지어 “공기의 맛이 다르다”고 표현해도 될 만큼 깊은 상쾌함.
산이 주는 정기와 맑은 기운은 우리를 한결 건강하게, 단단하게 만든다.
괴산의 산길은 대부분 인공 구조물이 거의 없고,
자연 그대로의 길을 따라 걷게 만든다.
특별히 위험한 구간만 최소한의 안전시설이 있을 뿐,
대부분 그 산의 본래 모습으로 사람을 맞이한다.
그 점이야말로
괴산의 산이 가진 진짜 가치라고 나는 믿는다.
눈에 보이는 ‘개발’이 아닌,
그 안에 있는 ‘숨결’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지역의 가장 아름다운 철학이다.
요즘 괴산군에서도 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여러 정책들이 추진되고 있다.
하지만 나는 생각한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감동하는 건
잘 닦인 데크나 설치된 구조물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자연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괴산의 명산을 개발하더라도
자연훼손을 최소화하고,
그 본래의 조용한 숨결을 그대로 유지하는 방향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이곳을 찾는 사람들도
우리처럼 산과의 교감을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믿는다.
이 자연은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니라,
괴산군민 모두의 자연사랑과 환경에 대한 애착이 쌓여 이뤄진 것이라는 걸.
아내와 나는 앞으로도 괴산의 명산들을
하나씩, 천천히 오를 것이다.
어쩌면 그건 ‘정상에 오르기 위한 등산’이 아니라,
자연과 함께 나이 들어가는 의식 같은 일이다.
삶이 가벼워질수록
걸음은 더 천천히,
숨은 더 깊게 쉬게 된다.
괴산의 산길을 오르는 일은
결국, 우리 부부가 괴산에 뿌리내리는 또 하나의 방식이다.
그리고 그 산이 주는 정기와 사랑은
우리가 앞으로도 괴산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줄 것이다.
지금은 아내의 몸이 예전 같지는 않지만
우리는 다시 걷기를 꿈꾼다.
완만한 오솔길부터 시작해
언젠가는 그때 그 능선 위에서
서로의 땀을 닦아주며 웃게 되리라 믿는다.
산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고,
바람은 예전처럼 능선을 스쳐간다.
그 길이 언젠가 다시
우리 둘의 발자국으로 채워지길 바란다.
나는 오늘도 마음속으로 외친다.
“산이 우리를 부른다.”
그리고 그 부름에
다시 응답할 날이
머지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