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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가난한 청춘이 세 아이의 아버지가 되기까지, 그 시간 속에 배운 사랑

by 최국만


세 아이가 모두 제 길을 찾아 떠난 뒤,

나는 비로소 ‘아버지’라는 이름의 울타리 밖으로 나왔다.

오랫동안 그 이름에 갇혀 살았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여전히 아버지이지만,

그보다 먼저 한 사람의 인간이다.

세상이 내게 부여한 수많은 역할 ,PD, 남편, 아버지 .

그 모든 이름을 잠시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는 연습을 하고 있다.


괴산의 산길을 걸으며, 나는 묻는다.

‘나는 지금 무엇으로 살아 있는가.’

그 물음 속에서 비로소 인간 최국만이 깨어난다.

누구의 아버지도 아닌, 누군가의 보호자도 아닌,

오직 한 인간으로서 다시 삶을 배우는 시간이다.


나는 ‘아버지’라는 이름을 너무 갑작스럽게 받아들였다.

첫 아이가 태어났을 때, 나는 여전히 세상과 싸우느라 바빴고, 삶이 내게 어떤 책임을 묻는지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채였지만, 누군가는 나를 ‘아버지’라 불렀다.

그 부름은 곧 내 삶의 중심이 되었고, 나는 그 무게에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애를 썼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내가 진정 ‘아버지’가 되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나 혼자만의 힘이 아니었다는 것을.

그 뒤에는 언제나 아내가 있었다.

아내는 내가 ‘좋은 아버지’가 되기를 누구보다도 간절히 바랐고, 묵묵히 그 길을 열어주었다.


아이들을 향한 나의 어색한 손길, 서툰 대화, 지친 얼굴에도 아내는 단 한 번도 나를 책망하지 않았다.

대신 “당신이 아이들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아이들이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를 조용히, 그리고 반복해서 말해주었다.

아내는 내게 아이들을 바라보는 눈길을 가르쳤고, 나의 말이 아이들에게 어떤 울림으로 전해지는지를 일깨워주었다.

아버지로 살아간다는 것이 단지 가장의 책임을 지는 것이 아니라, 아이들 마음에 남는 표정 하나, 말투 하나를 담아내는 일임을, 나는 아내를 통해 배웠다.


나는 가난한 집의 아들이었다.

누군가의 따뜻한 손길을 받아본 기억보다, 스스로 견뎌야 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

그 시절, 나의 아버지는 무뚝뚝하고 말이 없던 사람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내 아이들에게만큼은, 따뜻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방송국에서 일하며 늘 시간에 쫓겼고, 집에서는 늘 피곤했고, 아이들 곁을 오래 지켜주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그때마다 아내는 나 대신 아이들의 마음을 채워주었다.

아빠를 기다리다 잠든 아이들의 이마를 쓰다듬었고, 출근길에 내가 전하지 못한 미안함과 사랑을 대신 전달했다.

내 빈자리를 탓하기보단, 언젠가 내가 그 자리를 채울 수 있도록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늘 이렇게 말했다.

“너희 아빠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려고 오늘도 열심히 일하는 사람이야.”


그 말이 아이들의 마음속에 아버지의 자리를 지켜주었고, 그 말 덕분에 나는 아버지로 남을 수 있었다.

나는 위대한 아버지는 아니었지만, 아내가 나를 아버지로 세워주었고, 아이들은 그 사랑 위에서 자랐다.


이제 아이들은 모두 어른이 되었고, 나는 아버지라기보다는 조용한 ‘아버지의 그림자’로 살아간다.

그림자란 말이 조금은 쓸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나는 그 쓸쓸함을 사랑한다.

아이들이 필요할 때 곁에 있다가, 필요하지 않을 땐 조용히 물러나는 것.

그것이 나이 든 아버지가 지녀야 할 품격 아닐까.


요즘은 딸이 가끔 “아빠, 나도 아버지 같은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라고 말해준다.

그 말은 내가 살아온 모든 시간에 대한 가장 큰 위로이자 보상이다.

그리고 나는 안다.

그 말 속에는 아버지로서의 나뿐 아니라, 남편으로서의 나를 세워준 아내의 모습도 함께 담겨 있다는 것을.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살아온 시간.

그 시간은 나를 늙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사람답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아직도, 여전히 아버지로서 살아가고 있다.

다만 지금은, 한 발 물러선 자리에서 아이들의 삶을 응원하고, 그 곁에서 늘 함께해준 아내에게 조용히 고마움을 되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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