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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부. 그날 , 기종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을 잃은 청년, 그리고 그의 입을 대신해 울어야 했던 하루

by 최국만

1부


치과 대기실에 들어서는 순간, 기종이의 손이 내 손을 꽉 잡았다.

새하얀 조명 아래, 흰 가운을 입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었다.

그중 한 간호사가 우리 쪽을 향해 다가왔다.

그리고 그때, 나는 알 수 없는 묘한 기류를 느꼈다.


간호사의 시선이 잠시 기종이에게 머물렀다.

눈빛이 스쳐 지나가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 미세한 떨림이 스쳤다.

나는 그 표정을 알아봤다.

기억 속의 누군가를 갑자기 떠올린 사람의 표정이었다.


진료실 문 앞에서 이름을 확인하던 간호사가 조용히 말했다.

“혹시…기종이… 맞지?”

순간,기종이는 고개를 들지도, 대답하지도 못했다.

그는 그저 손끝을 움찔하며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나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는 기종이의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그때는 같은 반 친구였고, 운동장에서 함께 웃던 사이였다.

이제는 한쪽은 환자석에 앉고, 다른 한쪽은 진료용 장갑을 낀 채 서 있었다.

시간이 흘러 만들어놓은 잔인한 간격이었다.


나는 그 장면을 오래 바라보지 못했다.

말을 건네야 할 타이밍이 분명 있었지만, 그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잘 지냈니?’라는 말조차 상처처럼 느껴질 것 같았다.

그날 나는 그렇게, 기종이의 손을 꼭 잡은 채 침묵 속에서 진료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 짧은 침묵이 그렇게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날 , 기종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늘 그렇듯이.


하지만 그날만큼은

정말 말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었기에

그 침묵이 더 가슴 아팠다.


20년 만에 만난 친구 앞에서도,

이름을 부르는 그 목소리 앞에서도,

기종이는 끝내 고개만 돌렸다.


나는 그 아이의 눈가에 맺힌 눈물을 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이 아이는 단지 말을 못하는 게 아니라,

어쩌면 세상으로부터 말할 권리를 잃어버린 것일지도 모른다고.



나는 기종이를 돌본 지 3년째 되는 활동지원사다.

그는 말을 하지 못한다.

지적장애를 앓고 있고, 어머니 또한 장애가 있다.


우리는 함께 퍼즐을 맞추고, 글씨를 따라 쓰고,

웃기도 하고, 기도도 한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인가

그 아이가 자신의 뺨을 긁고, 허벅지를 때리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무언가가 분명히 이상했다.

하지만 말을 할 수 없는 아이는

통증을 소리 대신 몸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그것을 읽지 못하는 나 자신이 괴로웠다.


병원에 데려갔지만, 정신과 약 때문이란 말 외엔 해답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생각—

혹시 치통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기종이를 데리고 치과에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나는 상상도 못했던 하나의 진실과 또 하나의 슬픔을 마주했다.


“이가 8개나 썩었고, 사랑니도 자라고 있어요.”

의사는 혀를 차며 말했다.

“이건 상당히 오래 참은 거예요.

이 정도 통증이면, 말 못 하는 건 정말 고문 같은 일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 한편이 무너져내렸다.

이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그리고 그 아픔을 얼마나 오래 참고 있었을까.


하지만 그것은 끝이 아니었다.

진료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들른 읍내 치과에서,

20년 전 기종이의 고등학교 동창을 간호사로 만나게 되었다.


“기종아, 나야! 우리 고등학교 때 얼마나 친했잖아!”

그녀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뒤섞인 목소리로 다가왔다.

하지만 기종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왜 말을 안 해? 우리 그때 같이 다녔잖아.

너 말 잘했잖아. 착해서 친구도 많았고…”


간호사는 끝내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나도, 의사도, 아무 말이 없었다.

이 아이는 말을 잃은 것이 아니라,

말을 멈춘 것이 아닐까.


나는 기종이에게 조용히 말했다.

“기종아, 네 친구야. 20년 만에 만났어.”

그는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가에,

서늘한 물방울이 맺혔다.


그것은

“말하고 싶었어요”라는 말 없는 외침이었다.



우리는 연풍으로 돌아왔다.

평소 30분이면 닿을 거리였지만

그날따라 도로 위 시간이 너무 길고 무거웠다.


나는 운전대를 잡고 있었고

기종이는 조용히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침묵만이 우리를 감싸고 있었다.


이 아이는 왜 말을 멈췄을까.

누가 이 아이의 말을 가로막았을까.

언제부터 이 아이는,

침묵 속에서만 살아야 했을까.


나는 또다시 숙제를 받았다.

치아 치료는 시작일 뿐,

진짜 치료는 이 아이의 언어를 되찾아주는 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기종이가 다시 말을 할 수 있게 되길

나는 오늘도

기도한다.


그날 이후 나는 스스로에게 묻기 시작했다.

“기종이는 왜, 말을 멈추었을까.”


고등학교까지는 비록 어눌했지만

자신의 의사를 분명히 표현했던 아이.

친구도 있었고, 웃었고, 이야기할 줄 알았던 아이.


그 아이가

언제부터, 왜, 그리고 무엇 때문에 말문을 닫게 되었는지

나는 지금부터 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기로 했다.


이 글은

그 추적의 시작이었고,

그 이야기는 2부에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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