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은 기억을 이긴다
1000일 동안 나는 한 사람의 삶을 지켜보았다.
그의 이름은 오기종, 말이 없지만 세상을 온몸으로 살아내는 청년이다.
처음 그를 만났을 때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며 나는 깨달았다.
그는 나의 도움을 받는 존재가 아니라,
내가 인간으로 살아가는 법을 다시 배우게 해 준 스승이었다는 것을
얼마 전 기종이의 치아 치료를 위해 치과를 찾았다.
그곳에서 우연히 만난 고교 동창 간호사를 통해
나는 기종이의 충격적인 과거를 알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방치와 고통 속에서 자라야 했던 그의 이야기.
그의 침묵은 아픔의 흔적이었고,
그가 세상과 거리를 두었던 이유였다.
그 사실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단순한 ‘돌봄 제공자’가 아니라,
그의 삶의 일부를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는 걸 다시 느꼈다.
이제 기종이와 나는 해야 할 일이 더 많아졌다.
썩은 치아를 발치해야 하고,
척추측만증 치료를 위해 여러 병원을 다녀야 한다.
이 모든 과정은 단순한 치료가 아니라,
그가 조금 더 인간답게, 사람으로서 살아가기 위한 여정이다.
기종이 어머니 역시 지적장애인이다.
그래서 나는 기종이 곁에서 ‘보호자’가 아니라
‘삶의 동행자’로 서 있다.
서로 기대며, 서로를 통해 인간의 존엄을 배우고 있다.
〈기종이 시리즈〉를 연재하는 동안
수많은 독자들이 글을 읽고 응원의 마음을 보내주었다.
그 따뜻한 댓글과 메시지 하나하나가
나에게 큰 힘이 되었고,
무엇보다 “우리 사회가 여전히 약자를 향해 눈을 돌리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깊은 감사와 감동을 느꼈다.
기종이의 이야기는 고통의 재현이 아니라,
존엄의 복원이었다.
그의 삶을 기록함으로써
누군가는 ‘돌봄’의 진짜 의미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나는 충분히 잘했다고 생각한다.
이제 나는 기종이의 또 다른 1000일을 준비하고 있다.
그가 조금 더 웃을 수 있도록,
조금 더 스스로 걸을 수 있도록,
그리고 언젠가 내가 떠난 뒤에도
세상 속에서 한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나는 끝까지 그의 곁에 있을 것이다.
며칠 뒤, 10월 하순이면 규종이는 마흔한 살이 된다.
세월이 흘러도 그 웃음은 아이처럼 순수하다.
그날 나는 기종이에게 짜장면 한 그릇을 사줄 것이다.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
한 입 먹을 때마다 입가에 번지는 그 미소를 나는 안다.
기종이 목에 앞치마를 걸어주며
“기종아,흘리지 말고 잘 먹어,천천히“
검은 소스가 묻은 입술을 닦아주며
나는 또다시 마음속으로 다짐할 것이다.
“그래, 이 한 그릇의 짜장면이
너와 나, 우리가 함께 살아 있다는 증거다.”
그날,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마주 앉아 있을 것이다.
그의 눈빛은 말 대신 온기를 전하고,
나는 그 온기를 받아 기록할 것이다.
그 기록이 또 다른 하루를 살게 하는 이유가 된다.
“사람을 돌본다는 건, 결국 한 그릇의 따뜻한 짜장면 같은 일이다.
작지만 진심이면, 그 안에 모든 사랑이 담긴다.”
“그의 침묵 속에서 나는 인간을 배웠다.
그의 걸음 속에서 나는 기다림을 배웠다.
그리고 그 기다림 속에서 나는 나를 다시 만났다.”
규종이와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기종이 시리즈〉는 이렇게 막을 내리지만,
기종이와 나의 이야기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기록은 앞으로도 계속 된다.
우리의 하루는 오늘도 조용히 흘러가고 있다.
이제 기종이는 새로운 치료를 받고,
조금 더 단단해진 걸음으로 세상을 마주하게 될 것이다.
나는 여전히 그의 곁에서,
한 사람의 삶이 피어나는 과정을 지켜 볼 것이다.
이제부터의 기록은
‘돌봄’이 아니라 ‘동행’이 될 것이다.
그가 웃을 때 함께 웃고,
그가 힘들 때 함께 버티는 일상의 이야기들.
“이 시리즈는 끝이 아니다.
사람의 성장에는 완결이 없으니까.”
“나는 오늘도 기종이 곁에서
한 걸음 더 배우며 살아간다.”
조용한 산길, 병원 대기실, 그리고 식탁 위의 따뜻한 한 끼.
기록은 계속된다.
그의 삶을, 그리고 나의 배움을 함께 써 내려가겠다.
기종이와 함께 하셨던 애독자 여러분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