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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광의 그늘, 탐욕의 빛

또 하나의 환경파괴, 태양광 비리와 인간의 욕망

by 최국만


태양은 모든 생명에게 공평하다.

하지만 그 빛을 돈으로 가두려는 순간,

세상은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나는 오랫동안 환경문제를 깊이 있게 취재했다.

생명의 순환, 자연의 숨결, 인간의 탐욕이 만들어내는 파괴의 현장을

수없이 카메라에 담아왔다.

내 마음 한켠에는 언제나 ‘우리가 진짜로 지켜야 할 빛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남아 있었다.


태양광 설치 사업을 취재할 때였다.

겉으로는 ‘친환경 에너지 전환’이라 포장되어 있었지만,

그 현장은 환경을 파괴하는 또 하나의 산업 현장이었다.


산허리를 베어내고, 수백 그루의 나무가 쓰러져 나갔다.

비가 내리면 흙탕물이 계곡으로 쏟아져 들어가

오염된 물이 농토를 덮었다.

산은 더 이상 숨을 쉬지 못했고,

그 위에 얹힌 패널들은 ‘깨끗한 에너지’라는 이름으로

태양빛을 돈으로 바꾸고 있었다.


나는 그 현장에서 ‘녹색의 이름으로 녹색을 파괴하는 인간의 모순’을 보았다.

그것은 단지 환경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양심이 무너지는 과정이었다.


취재를 하며 가장 마음 아팠던 건 힘 없는 마을 사람들이었다.

“우리 마을에도 태양광이 들어온대요. 주민동의요? 그런 거 없었어요.”

그들의 말은 분노보다 체념에 가까웠다.

땅은 어느 날 갑자기 개발업체에 넘어갔고,

산비탈엔 중장비가 올라갔다.


권력과 돈의 커넥션 속에서

‘빽’이 없는 사람들은 아무 힘도 없었다.

산림을 깎고, 전선을 잇고, 패널을 세우는 동안

마을은 더 이상 예전의 마을이 아니었다.

삶의 터전이자 추억의 산이었던 곳이

이익의 계산서 위에 올라가 있었다.


“환경을 살리겠다면서 왜 산을 죽입니까?”

그 질문에 답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태양광 사업의 본질은 ‘속도전’이었다.

빨리 승인받고, 빨리 설치하고, 빨리 보조금을 타내는 것.

그 과정에서 서류는 조작됐고,

감독기관은 침묵했다.

로비와 리베이트가 얽히며

‘친환경 사업’은 순식간에 ‘비리의 온상’으로 변했다.


또 다른 취재는 너무나 비극이었다.

비극은 ‘투자했다가 망했다’는 이야기다.

한 은퇴자가 노후퇴직금으로 태양광 발전사업에 투자했지만 결국 전 재산과 집까지 잃었고

결국 그는 생을 마감했다.

이처럼 빽이 없거나 정보가 부족한 주민·시니어들은

‘친환경 수익사업’이라는 말만 믿고 뛰어들었다가

결국 ‘속수무책’으로 밀려나갔다.

이후에도 태양광 취재를 하면서

이와 같은 예는 수없이 보았다.


나는 그 취재현장 앞에서 인간의 본모습을 봤다.

태양은 변함없이 떠오르지만,

그 빛을 욕망으로 가둘 때

인간은 가장 어두워진다는 사실을.


나는 그 현장을 취재하며 스스로에게 묻곤 했다.

“나는 지금, 누구의 편에 서 있는가.”

언론은 권력이 아니라 양심의 직업이다.

진실을 밝히는 일은 불편하지만,

그 불편함이 세상을 조금씩 바꾼다.


그 신념으로 나는 태양광 비리의 실체를 보도했다.

방송을 준비하면서 외부로 부터 받은 회유,협박은 너무나 거셌다.

제보자는 나를 신뢰했고 나는 그들을 믿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값진 건

진실을 끝까지 지켜본 제보자들과 주민들의 믿음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 빛을 좇는다.

언론의 사명은 세상을 비추는 것이 아니라,

어둠을 두려워하지 않는 ‘빛의 방향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내 인생이 증명해 왔기 때문이다.


태양은 여전히 떠오른다.

그러나 그 빛이 공평하게 퍼지는 것은 아니다.

패널 위에서 떨어져간 한 생명,

퇴직금과 함께 날아간 꿈,

베어진 숲과 떠난 산새들은

우리에게 묻는다.

“이 빛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나는 오늘도 답하려 한다.

언론인의 사명은 ‘빛을 비추기’가 아니라,

‘빛이 닿지 않는 어둠을 함께 들여다보는 것’임을.


“빛은 누구에게나 내리쬐지만,

그 빛을 돈의 언어로 재단할 때

사람은 가장 어두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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