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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31. 2017

3월- 이미 쓰여져야 했던 편지 (2)

우리 학교 교정은 참 예뻤어. 봄은 꽃으로, 가을은 단풍으로 치장한 듯 물드는 곳이었거든. 개나리로 시작해 진달래, 벚꽃, 철쭉까지. 꽃 길을 걸으면 나까지 화려함에 물드는 느낌이 들었어. 더 선명하고 더 향기나는 존재로 봄을 통과하는 흥분 같은 거 말이야. 


근데 이모, 그 봄은 그러질 못했어. 2010년의 봄. 그 때의 봄은 내게 색채가 없어. 나는 이모가 입원한 병원과 도서관 사이를 가장 많이 오갔지. 병원과 대학 캠퍼스 사이에는 작은 길이 나 있었어. 정원을 가로지르는 길이었는데, 원래 있었다기보다 사람들의 왕래로 길의 형상을 갓 띤 것 같았지. 그리고 그 길이 난 정원에는 유독 백목련 나무가 많았어. 


어찌나 하얗던지, 달밤에는그 아래가 환했어. 조모임이나 스터디를 마치거나 과외를 끝내고 와서 이모를 만나러 가던 길은 어둡지 않았어. 이모 병실에서 등장인물도 줄거리도 잘 모르는 일일 드라마를 같이 보고서 이모가 남긴 음식을 검은 봉지에 담아 다시 도서관으로 가는 길도 무섭지 않았지. 가로등 없는 그 길 위를, 백목련 꽃잎들이 내내 비춰주었거든. 이모의 흰 가운처럼 반짝이고 나폴거리던 커다란 꽃잎들. 


봄 꽃 중 가장 빨리 피는 백목련은 진짜 봄이 시작되겠구나, 싶을 때 벌써 저버려. 3월 중순이 넘어가자 꽃잎이 하나 둘 떨어졌고 밤들은 조금씩 캄캄해져갔어. 어느 날부터 길 위에 떨어진 꽃잎들이 밟히기 시작하는데, 흰 꽃잎이라 갈변되는 부분은 너무 선명하게 도드라져 보이잖아. 하얗고 눈부신 꽃잎이 떨어지면 어떤 꽃잎보다도 빠르고 추하게 썩는 것 같았어. 생전 환한 빛을 품고 있다가 너무 빨리 떨어져 죽고 마는, 그 운명을 나는 그 봄 내내 목격하면서 걸었어.


어떻게 그 밤을, 그 길을, 울지 않으며 걸을 수 있었겠어, 이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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