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Dec 01. 2018

원형의 문자: 처음과 끝이 구분되지 않는 동시적 세계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와 영화 <컨택트>

 언어가 인간의 사고를 구성한다는 건 자명한 사실입니다. 언어의 체계는 자연스럽게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을 형성합니다. 라캉이 인간의 무의식까지도 언어로 구조화되어 있다고 선언했을 만큼 (물론 이 주장은 단순화해서 인용해선 안되는 복잡한 논의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언어는 단순히 말과 글의 수단이 아닌 것입니다. 거칠게 환원한다면, 언어의 구조는 그 언어권의 세계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가령, 한국어의 ‘우리’라는 개념과 다양한 용법이 다른 언어권에서는 쉽게 설명되기 어려운 점을 생각해볼 수 있을 거예요. 그리고 이 독특한 집단의식과 소속감이 –언어에 의해 강화되었든 혹은 의식으로부터 언어가 형성되었든 그 엄밀한 선후관계를 떠나- 이 언어와 강하게 연결되어 있음을 부정하긴 어렵겠죠. 그런데 다소간 보편적인 언어규범을 공유하고 있는 인류의 언어 외부의, 완전히 다른 언어를 우리는 상상해볼 수 있을까요?





 추상작품처럼 보이는 이 다양한 원들은 실은 헵타포트가 쓰는 언어의 문자입니다. 원형의 문장인 셈이죠. 헵타포트는 영화 <컨택트>(원제: arrival)에서 돌연 지구에 찾아온 외계 종족입니다. 드니 빌뵈브 감독이 2016년에 제작한 이 영화는 테드 창 Ted Chiang의 단편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를 각색한 작품입니다. 테드 창은 물리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미국의 과학자로, 동시대 가장 지적인 과학소설가로 평가받고 있어요. 소설을 원작으로 만들어진 모든 영화가 원작과 가지는 간극을 이 영화 또한 가지고 있습니다. 시청각적 장르라는 영화 매체의 장점을 훌륭하게 살렸다는 측면에서 저는 장르의 간극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켰다고 생각해요. 이야기가 내포한 언어와 세계에 대한 철학적인 이해는 소설에서 심도 깊게 접근할 수 있는 반면, 영화는 소설에서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장면들을 보다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게 해주니까요.




'네 인생의 이야기'가 수록된 테드 창의 <당신 인생의 이야기> 소설집. 그리고 영화 <컨택트>(arrival)의 포스터. 국내버전은 설명이 덕지덕지 붙어있어서 해외버전으로!




 주인공인 언어학자 루이스는 헵타포트가 지구에 온 목적을 알아내야 한다는 사명을 부여 받고 이들과 접촉하게 됩니다. 그녀는 문자 기록을 병행하며 대화를 시도하는 방식으로 그들의 언어에 접근합니다. 하지만 처음 본 헵타포트의 문장에 적잖이 충격을 받아요. 우리의 언어처럼 어순에 따라 일렬로 배치되는 구조가 아니라, 어디에서도 시작할 수 있고 끝날 수 있는 순환적인 형태였기 때문이죠. 이것은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헵타포드 문장의 획들은 여러 개의 구를 가로지르는데, 이 획들의 관계가 매우 밀접해서 하나를 빼려면 문장 전체를 다시 계획해야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루이스는 이들이 똑같은 말을 할 때도 매번 어순이 제멋대로 달라진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이들의 언어가 시간의 순서를 따르는 체계가 아님을 알게 됩니다.


 작가는 헵타포트의 언어를 형성한 그들의 세계관을 ‘목적론적 세계관’으로 말합니다. 인간은 세계를 ‘인과론적’으로 파악합니다. 언제나 순차적인 시간 개념 안에서 현상을 바라보고 그것을 원인과 결과라는 논리적 관계로 설명하려고 하지요. 반면 헵타포트는 세계를 동시적으로 바라봅니다. 아니, 동시적으로 경험한다는 표현이 더 정확하겠네요. 그들에게 과거와 현재와 미래는 언제나 동시에 존재하며, 그들은 모든 것을 선후 관계 없이 한꺼번에 경험합니다. 그들에게는 인과의 논리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동시적인 세계에서는 원인과 결과가 존재할 수 없으니까요. 단지 “현상의 근원에 깔린 하나의 목적”만을 지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로 이어지는 원, 시작도 끝도 구분되어 존재하지 않는 문장은 이들의 세계관을 그대로 형상화한 문자인 것이지요.



 

영화 연출도 훌륭하지만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는 정말.. 헵타포트를 대면하러 갈 때의 공포와 긴장, 그들에게서 느끼는 경이로움, 대화하려는 절박함 등 미묘한 감정들이 모두.





 고백하자면, 인간의 언어로만 말하고 사유해온 저에게 이 언어가 아닌 다른 언어, 그리고 그 언어가 표방하고 있는 다른 세계관을 이해하는 일은 어렵습니다. 개념적으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이 또한 저의 오만한 착각일지 모릅니다- 실제로 그렇게 세계를 인식하고 살아가는 걸 상상하는 일조차 버겁게 느껴집니다. 헵타포트의 언어를 끈질기게 연구한 루이스는 마침내 동시적으로 세계를 살 수 있게 된 것처럼 보입니다. 그녀에게 과거와 미래는 늘 현재와 공존하게 됩니다. 그녀는 앞으로의 미래를 압니다. 그러나 이것이 운명은 모두 정해져 있고 그 안에서 인간은 미래를 바꿀 수 없는 무력한 존재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미래가 예정되어 있을지라도 현재의 매순간을 최대치로 누릴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지요. 즉, 역설적이게도 '지금 이 순간'에 충실해지는 삶이 가능해집니다. 만약 이 모든 설명이 허무맹랑하게 들린다면 그건 여전히 인과적인 세계로 사유하는 우리 인식의 한계 때문일 것입니다. 헵타포트의 목적록적 세계에서도 미래를 스스로 선택하고 바꿀 수 있다는 우리의 정의와는 다른 차원으로 작용하는 자유의지가 존재하고 있으니까요. 


  다시, 헵타포트의 문장을 봅니다. 그리고 그들이 살아가는 세계-분명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와 같지만 다를-를 가늠해봅니다. 그 세계 안에서 저에 대해 생각한다는 것은, 지금 어느 지점에 위치해있는 가의 문제가 아닐 겁니다. 저의 존재가 향하는 커다란 목적에 대해 생각해본다는 것이겠지요. 오늘만큼은 헵타포트처럼 저의 과거-현재-미래가 수렴되는 삶의 목적을 고민해보아야겠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기원'을 찾아 떠난 시인의 생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