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Dec 31. 2018

역사가 지워버린 작은 존재들의 이야기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이 일깨우는 미시 서사의 힘

 소설가 한승우는 사고로 아내와 어린 딸 봄이를 잃은 이후로 한줄도 써내려가지 못합니다. 그에게는 종종 의문의 노크소리가 들립니다. 똑 똑 똑똑 똑똑똑. 나무 판자를 두드리는 둔탁한 소리는 실은 오래된 수첩에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한승우는 바로 그 수첩을 마지막으로 쥐고 있던 사람이죠. 노크는 누구로부터 누구에게로 향하는 걸까요. 어떤 의미를 담고 있고 무엇을 촉구하는 소리일까요. 딸의 환영은 부탁합니다. ‘아직 늦지 않았어. 이야기는 지금부터야.’ 아내는 충고합니다. ‘절대 포기하지마.’ 한승우는 다시금 어렵사리 글을 쓰기 시작합니다. 그가 글을 쓴다는 것은 수첩을 다시 펼쳐, 그곳에 기록된 이들의 삶을 끄집어내는 행위와 같습니다. 낡은 수첩에는 한국 근현대사-제주 4.3부터 한국전쟁, 반공의 독재정권-를 살아낸 평범한 개인들이 남긴 기록이 있습니다. 역사 속에서 제대로 기억되지 못하고 잊혀져 있던 존재들. 이들은 마침내 소설가의 손끝에서 역사의 무대로 나오게 됩니다. 


주인공 소설가 한승우의 책상. 괴로움 속에서 절필한 그이지만 그는 조금씩 용기를 내봅니다.




 물질하듯 무대 위를 헤엄치는 동생과 함께 등장하는 소년 나선호는 제주4.3때 서북청년단에 의해 가족을 모두 잃고 일본의 미군훈련소로 보내집니다. 15살인 그에게 영어는 알아들을 수 없고 소총은 무겁기만 하지만 갈 곳 없는 그는 군대에 소속된 걸 감사히 여길 뿐이죠. 작가가 꿈인 그는 상자에서 뜯어낸 갱지를 군화끈으로 묶어 수첩을 만듭니다. 그리고 하루하루를 기록해요. 한국전쟁에 파견된 그는 민간인 시체더미에서 살아남은 고아를 발견하고 몰래 데려와 갱내 궤짝에 숨겨놓습니다. 하지만 중공군의 공격으로 선호는 자신을 기다리는 아이를 놔둔 채 죽고, 그의 수첩은 중공군 부대원인 강호룡의 손에 들어갑니다. 수첩은 뒤이어 인민군 낙오병의 시자의 손에 머물렀다가 그녀의 동생 시춘에게로 전해지고, 시춘은 학생들에게 시대의 ‘감각’을 갖도록 가르치는 작가가 됩니다. 그녀가 간첩으로 몰리며 수첩과 그녀의 미완성 희곡은 운동권 제자였던 한대길 앞에 놓입니다.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놓여있던 대길은 이와 관련된 죄책감과 부채의식을 안고 평생을 삽니다. 훗날 소설가 한승우가 되어서도 말이죠. 


 연극은 환영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승우의 현재와 그가 글을 쓰며 대면하게 되는 수첩 속 개인들의 삶을 교차시켜 보여줍니다. 소설가의 의식과 작품 속에서 과거의 존재들은 현재적인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본래 이 연극의 원제는 “작가들”이었다고 해요. 극에서 시춘이 대길에게 집필 중인 희곡을 언급할 때도 그 제목을 “작가들”로 말하기도 하지요. 제목이 의미하는 복수의 작가는 수첩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 영웅의 서사였습니다. 영광과 승리의 전설인 역사는 주변부의 이야기를 지워버립니다. 선과 악, 승과 패 같은 선명한 구조 속에서 대립된 두 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복합적인 맥락의 개인들은 사라지는 거죠. 개인의 미시 서사를 중요시하는 최근의 경향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합니다. 편중된 역사를 총체적인 역사로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거대담론이 소외시킨 개인의 삶들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제주 소년이 어떻게 일본에 주둔한 미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됐는지, 일본군에게 독립군의 정보를 팔던 소년이 어찌하여 중공군이 되는지, 평범한 여의사가 왜 의용군이 되는지, 기존의 역사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했던 비극에 대해서도 헤아리지 못하게 하죠. 그런 의미에서 수첩 속 선호, 호룡, 시자 그리고 시춘은 작가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역사가 품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이니까요.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배우들의 커튼콜. 탄탄한 구성과 섬세한 연출, 배우들의 열연까지 완벽한 연극. (출처: 극단 달나라동백꽃 페북)







 연극은 환영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한승우의 현재와 그가 글을 쓰며 대면하게 되는 수첩 속 개인들의 삶을 교차시켜 보여줍니다. 소설가의 의식과 작품 속에서 과거의 존재들은 현재적인 의미로 다시 태어납니다. 본래 이 연극의 원제는 “작가들”이었다고 해요. 극에서 시춘이 대길에게 집필 중인 희곡을 언급할 때도 그 제목을 “작가들”로 말하기도 하지요. 제목이 의미하는 복수의 작가는 수첩에 자신의 흔적을 남긴 모든 이들을 지칭하는 것일 겁니다. 지금까지의 역사는 승자에 의해 쓰여진 영웅의 서사였습니다. 영광과 승리의 전설인 역사는 주변부의 이야기를 지워버립니다. 선과 악, 승과 패 같은 선명한 구조 속에서 대립된 두 항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복합적인 맥락의 개인들은 사라지는 거죠. 개인의 미시 서사를 중요시하는 최근의 경향은 이러한 문제의식에 근거합니다. 편중된 역사를 총체적인 역사로 재구축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거대담론이 소외시킨 개인의 삶들을 들여다보아야 합니다. 제주 소년이 어떻게 일본에 주둔한 미군훈련소에 입소하게 됐는지, 일본군에게 독립군의 정보를 팔던 소년이 어찌하여 중공군이 되는지, 평범한 여의사가 왜 의용군이 되는지, 기존의 역사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같은 민족이 서로가 서로를 죽여야 했던 비극에 대해서도 헤아리지 못하게 하죠. 그런 의미에서 수첩 속 선호, 호룡, 시자 그리고 시춘은 작가로서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존재 자체가 역사가 품지 못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목소리이니까요. 


 사실 <썬샤인의 전사들> 안에는 또 다른 층위의 이야기가 존재합니다. 바로 한승우와 딸 봄이가 역할극을 하며 주고받는 만화 ‘썬샤인의 전사들’의 이야기 입니다. 만화 속 괴물인 블랙드락을 물리치는 방법은 전체 극의 전개와 맞물려 나아가는 중요한 은유입니다. 거울에 비친 블랙드락은 타버린다는 사실이 발견되지만, 이내 블랙드락에게 거울을 비춘 사람 또한 괴물이 되어버린다는 문제가 생겨납니다. 극 마지막에서야 한승우는 해결방법을 찾게 되는데, 바로 블랙드락의 초상화를 그리는 거예요. 자신의 얼굴을 그리는 행위는 괴물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 그 괴물의 괴물성을 약하게 해 마침내 인간이 되도록 합니다. 저는 이 방법이 우리가 역사를 사유하는데 있어 필요한 태도를 함축하는 것이란 생각을 했습니다. 오랫동안, 촘촘히, 보이는 것을 너머 쉽게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려는 마음. 성급한 판단을 경계하고 반성하고 성찰하는 노력. 그것은 우리 곁에 존재하는, 수많은 작은 작가들의 이야기를 들으려는 자세와도 맞닿아 있을 겁니다. 




선호가 순이를 숨겨놓은 궤짝. 금방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하며 떠난 선호는 다시 이 문을 열지 못합니다.




 똑 똑 똑똑 똑똑똑. 노크는 정중한 행위입니다. 정중하게 상대방의 응답을 바라는 행위이지요. 궤짝의 문을 사이에 두고 선호와 고아 순이가 주고 받았던 암호이자 인사는, 어쩌면 사람과 사람 사이의 기본적인 약속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지키겠다는 의지, 인간의 선함을 의심하지 않는 믿음. 그렇게 시공간의 경계를 넘어 이어지는 약속들이 인류를 지속시켜온 게 아닐까요. 한승우는 과거가 두드리는 노크 소리에 글로써 응답합니다. 닫힌 이야기의 문을 열어, 묻혀있던 작은 존재들의 생을 세상에 들려줍니다. 역사는 대다수의 개인을 작은 존재로 축소시키지만, 우리의 노력으로 인해 그들은 거대한 존재로 호명될 수 있습니다. 삶을 기록하고 전달하며 기억하게 하는 의무감을 가질 때,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책임은 우리를 작가로 변하게 합니다. 그만 자라는 한승우의 타이름에 봄이가 신경질을 내죠. “왜 항상 오늘이야? 내일은 없어? 내일은 언제와?”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는 한 진정한 의미에서의 내일은 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시대의 흐름과 거대한 구조 속의 개인을 들여다보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이해의 지평을 넓히지 못할 것입니다. 



*연극 <썬샤인의 전사들> 

◇2016년 제 10회 차범석 희곡상 수상작

◇작가_김은성 (주요작품: <그 개><함익><로풍찬 유랑극장><뺑뺑뺑><달나라연속극><목란언니><뻘><시동라사><순우삼촌>외 다수)

◇연출_부새롬 (주요작품: <그 개><2센치 낮은 계단><로풍찬 유랑극장><검은 입김의 신><아이엠파인투><뺑뺑뺑><달나라연속극>외 다수)

◇출연_유성주/성여진/곽지숙/권태건/전석찬/신정원/이지혜/김정화/조재영/한기장/노기용/박세인/박주영

◇본 연극은 2016년 두산아트센터에서 두산연강예술상 수상자 신작으로 초연하였으며,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 창작산실 올해의 레퍼토리로 선정, 지원되어 CKL스테이지에서 12.8~12.30 상연하였습니다.  


이전 12화 증언의 기록과 보여줌으로써의 증언의 간극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