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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20. 2019

보이지 않는 곳, 들리지 않는 이야기는 언제나 있다

연극 <THE Helmet(더 헬멧)-Rooms Vol.1>

 연극 <The Helmet>은 하얀 헬멧을 쓴 이들을 둘러싼 이야기입니다. 하얀 헬멧은 동떨어진 시공간의 이야기를 하나의 극으로 묶는 구심점이 되는데, 1987-91년 한국 서울에서의 이야기가 하나, 2017년 시리아 알레포의 이야기가 또 다른 하나입니다. 연극은 서울과 알레포를 번갈아 가며 무대로 옮겨오며, 회차를 ‘룸서울’과 ‘룸알레포’로 구분하죠. 그러나 이 연극의 독특함은 하나의 무대가 분할되어 극이 진행되는 구성에 있습니다. 관객석은 직사각형의 무대를 사방위로 둘러싸고 있습니다. 무대를 가로질러 처지는 벽은 무대뿐만 아니라 관객석까지 공간적으로 단절시킵니다. 연극은 두 개의 무대에서 각각의 관객 앞에서 독립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연극은 동시에 진행되지만 관객은 벽 너머 반대편 무대에서 일어나는 극은 보지 못합니다. ‘빅룸’과 ‘스몰룸’의 구분은 이러한 공간 구분에 따른 것입니다. 그래서 연극 <The Helmet>은 하나의 연극이지만 네 개의 공연이라고 말해지곤 합니다. 




무대를 가로지르는 벽이 닫히기 전(좌)과 닫힌 후(우). (출처:NEWS1)



 저는 ‘룸서울’의 ‘빅룸’에 있었습니다. 1987-91년 서울의 하얀 헬멧은 백골단을 의미합니다. 백골단은 시위대를 진압하는데 투입됐던 사복 경찰단으로, 일반 전투경찰과 달리 하얀 헬멧에 청자켓을 주로 입었습니다. 이들의 존재감은 비단 복장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동력 높은 복장이 암시하듯, 백골단은 무술 유단자나 특전사 출신이었고 작은 방패와 곤봉을 들고 시위대 한가운데로 돌격해왔죠. 대학생 시위가 과격해진 이유로 백골단의 과잉진압이 지적되곤 했습니다. ‘빅룸’은 시위대 요주의 인물을 쫓아 서점 지하 창고로 온 백골단의 공간입니다. 반대편 ‘스몰룸’은 백골단을 피해 창고 안에 숨은 학생들의 공간이죠. 공간을 나누는 벽은 소음을 완전히 차단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저곳의 커다란 비명이나 과격한 움직임은 때때로 벽을 너머 이곳의 긴장을 침범하곤 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 문이 열리고 벽이 걷히면서, 공간은 하나가 되고 그간의 과정은 알 수 없는, 결말로서의 저곳과 만나게 됩니다.     


 룸서울은 쫓기는 학생과 쫓는 백골단의 단순한 이분법을 재현하지 않습니다. 화염병을 만들기 위해 소주를 마시던 학생이 몇 년 후 백골단이 되어 시위현장에서 후배를 만날까 두려워합니다. 프락치가 될 수 밖에 없었던 백골단의 여성경찰도 있고, 시위대를 위해 백골단에서 프락치 역할을 하려 고민하는 이도 존재합니다. 단순한 정체성과 명확한 인과로 설명되는 개인은 없다는 걸 연극은 보여줍니다. 상대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애쓰는 감각은 약한 이들이 더 섬세하게 가지고 있다는 슬픈 사실도 잘 드러나요. 학생들은 화염병을 반드시 바닥에 내리 꽂히게 던져야 한다고 구호를 외치고, 백골단도 자신과 같은 학생들이라는 걸 안타깝게 여깁니다. 정작 백골단에서는 그들의 ‘어찌할 수 없는’ 처지가 폭력을 정당화하는데 손쉽게 이용되는 반면에 말이죠. 





백골단을 피해 스몰룸에 몸을 숨긴 시위대 학생들. 4년 후 이 스몰룸에는 백골단에 잡힌 시위대 학생들이 갇히게 되는데, 이 분절된 이야기는 벽이 사라지는 마지막에 하나로 이어집니다



 극이 시작되고 무대를 가로질러 닫히는 벽은 연출적 효과뿐만 아니라 중요한 상징과도 같았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건을 다루는데 잊지 말아야 할 태도를 상기시켜주니까요. 동일한 시공간 속에 있어도 관객은 어디에 앉게 되느냐에 따라 어느 한쪽의 진실만을 목격하게 됩니다. 다른 한쪽의 진실을 가리고 있는 건 사실 의지만 있으면 열어젖힐 수 있는 벽인데 말이지요. 언제 어디서든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곳이 존재하고, 우리에게 들려지지 않는 이야기는 말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실에 접근하려는 노력에는 내게 보이고 내가 들은 것만을 믿는 성급함은 위험합니다. 그것이 전부라고 착각하게 하는 어떤 벽이 우리의 주변에 처져 있는 것이 아닌지, 그 벽 너머의 다른 진실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 끝까지 포기하지 말아야겠지요. 극이 끝으로 치닫고 빅룸과 스몰룸 사이의 벽이 걷히면서 땀과 눈물로 젖은 결말로서의 저들을 봤을 때 느꼈던 당혹함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스몰룸’에서의 연극도 보아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보이지 않는 곳, 들리지 않는 이야기를 향한 마음의 기울임을 끝까지 지켜나가겠습니다. 



*아직 보지 못한 3개의 다른 공연 ('룸서울'의 '스몰룸' / '룸알레포'의 '빅룸' 과 '스몰룸') 같이 보러가요. 계획 있으신 분은 귀뜸 주세요. 스몰룸은 빅룸보다 객석 규모가 작아서그런지 일찍 매진이 되더라고요. 참고하시구요! 




*연극 <THE Helmet(더 헬멧)-Rooms Vol.1>

-연극은 ‘룸서울’과 ‘룸알레포’로 나뉘어 공연됩니다. 관객석의 A-B 구역은 ‘스몰룸’으로, C-D 구역은 ‘빅룸’으로 구분됩니다. 김태형 연출가는 어떤 공연을 어떤 순서로 보아도 상관없다고 조언합니다 :) 

-공연기간: 2019.1.8(화) ~2.27(수) / 공연장소: 세종문화회관 S씨어터 

-평일은 오후 7:30, 9:00, 총 2회, 주말은 오후 3:00, 5:00, 7:30, 총 3회 공연합니다. (월요일은 공연이 없구요) 

-예매: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P0001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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