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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31. 2019

그들은 왜 ‘비명’을 지르는 자가 되었을까

연극 <비명자들1>의 비명 읽기

 연극 <비명자들1>은 아프가니스탄의 장례식을 타겟으로 한 미군의 폭탄 학살 장면에서 시작됩니다. 주인공인 요한은 아버지 기업의 페이퍼컴퍼니를 위해 타의로 미군에 자원한 금수저입니다. 그는 인권이나 평화의 문제에는 관심이 없고 총을 쏠 수 있다는 사실에 군생활의 위안을 얻는 비뚤어진 냉혈한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학살에서 수백명의 처참한 시체를 목도하고 정신적, 육체적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무통증’의 증상을 얻게 됩니다. 이 증상 때문에 그는 조기퇴소 판정을 받고 한국으로 귀환하죠. 그리고 그가 도착한 서울에서 전 세계를 공포에 빠트린 질병의 환자가 발생합니다. 바로 ‘비명자(悲鳴者)’입니다. 


 비명자는 끝없이 비명만을 지르는 사람입니다. 이들이 위험한 이유는 반경 4키로미터 이내에 있는사람들에게 끔찍한 정신적 고통을 느끼게 하기 때문이죠. 게다가 그에게 폭력을 가할 경우 그 육체적 고통은 비명자 당사자를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전가됩니다. 비명의 원인도 형태도 규명되지 못한 이 증상에 뾰족한 해결책은 없습니다. 비명자를 고립시키지 않는 이상, 주변 사람들은 똑같이 고통에 빠져들고 만약 비명자를 죽일 경우 모두가 함께 죽습니다. 이러한 비명자가 인구 밀도가 높은 서울에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유한은 고통의 헬게이트에서 비명자의 고통에 전이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입니다. 


 연극은 유한이 비명자를 죽이고 기소된 재판을 통해 그리고 비명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진행하는 고통연구소를 통해 비명자에 대한 윤리적 고민으로 관객을 끌어들입니다. 정부는 비명자의 발생을 국가적 재난 상황으로 규정하고 예방과 해결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죠. 그러나 이들이 ‘제거’, ‘처리’라는 용어를 쓰는 데서 알 수 있듯이 그들은 비명자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이들이 비명자 연구를 위해 끌어들인 고통연구소의 보현은 그들을 살려내는데 분투하는 인물입니다. 모두가 비명자가 고통을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전이시키는 상황을 문제삼을 때, 그녀만이 비명자들도 무고한 사람임을 주장하죠. 그들에겐 고통을 폭력으로 휘두를 의도가 애초에 없었다는 것을 그녀는 믿고 있습니다. 




현대무용과 음악이 결합된 종합예술극 <비명자들1> (출처: 연합뉴스)



 저는 이 작품에서 비명의 함의를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모두가 동의할 겁니다. 비명은 언어가 아니라는 사실을요. 그것은 외마디 내지름, 원초적이고 본능적인 음성이지요. 그래서 비명을 언어의 결핍 상태로써 읽어내는 시각도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비명자들1’의 비명은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요? 언어의 결핍은 크게 두 가지 측면으로 나누어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말하는 이에게 대상이나 사태를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언어가 부재한 상태입니다. 그러나 단순히 말하는 이에만 달려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두번째는 청자의 부재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말하는 이의 언어를 수용해줄 타자가 부재한 상태, 즉 그들의 말을 들을 준비가 되지 않은 사회가 원인이 되는 것입니다. 

 

 저는 <비명자들1>의 비명은 후자에서 파생되었다고 여겨집니다. 이해성 연출가는 한 인터뷰에서 작품에 세월호의 비극과 화력발전소 하청업체 비정규직 노동자였던 김용균 씨의 사연이 녹아 있다고 밝힌 바 있습니다. 연극에서는 페리호 참사로 외동딸을 잃은 첫번째 비명자와 화력발전소 하청업자로 사고와 농성으로 동료들을 잃은 두번째 비명자는 그들의 이야기를 차용한 허구의 인물들이에요. 연출가는 “한국 사회에서 비명자의 소재를 계속 제공한다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습니다”라고 덧붙였죠.* 세월호 유가족들이나 지게차, 공장 굴뚝 위에서 시위를 이어갔던 수많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한국에서 마주했던 현실은 청자의 부재였습니다. 의제의 공감대가 사회적으로 형성되지 않았을 때 외쳐지는 말들은 아무리 진실되고 중요해도 좀처럼 들리지 않습니다. 자신의 말들이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실패하고 좌절이 반복될 때, 결국 그들은 말을 포기하고 울음으로 비명으로, 온 몸으로 저항했지요. ‘비명자’의 비명은 생물학적 질병이 아니라 사회적 참사의 결과일 것입니다. 


 비명자가 비명이란 증상을 전염시켜 비명자를 만들어내지 않고, 자신의 고통을 똑같이 느끼도록 하는 설정은 그래서 더욱 의미심장하게 느껴졌습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의 만연한 타인의 고통에 반응하게 되는 것은 반드시 동일한 고통을 느껴야만 가능해지는 것일까요? <비명자들1>은 사회에서 소외당하고 배제당한 이들의 언어가 비명이 되도록 내몰 경우 결국 우리 모두의 재난이 될 거라는 무시무시한 암시처럼 보였습니다. 



 

 무통증의 요한이 비명자의 목을 조르기 직전, 그는 비명자의 비명이 또렷한 고백의 언어로 들리는 순간을 경험합니다. 비명자들은 실은 누구를 해할 악한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저 자신의 말을 들어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고통이 들릴 때까지 시름시름 앓다가 마지막 발악으로 그들은 비명을 지를 수밖에 없던 것입니다. <비명자들1>은 훌륭한 ‘연극’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생생한 현실의 일부처럼 가슴을 내리쳤습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 사회 구석구석에는 울음 섞이고 분노가 점철된 비명들이 터져나오고 있을 것입니다. 저는 그 비명을 들을 수 있을까요? 여러분은 고통의 언어를 들을 준비가 되셨나요? 수많은 이들의 말들이 비명이 되지 않도록 막을 수 있는 힘이 우리에게 있을까요? 



<비명자들1>:비명이 있다

-일시: 2019.3.22.-3.31

-장소: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작, 연출: 이해성

-러닝타임: 120분(인터미션 없음)

-<비명자들1>은 2017년 초연하고 2018년에 재연한 <비명자들2>의 프리퀄에 해당하는 작품입니다. 이해성 연출가는 <비명자들2>에 해당하는 이야기를 먼저 쓰기 시작했으나, 집필 과정에서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는 걸 실감하고 <비명자들1>과 <비명자들3>을 구상했다고 합니다. <비명자들3>은 극단고래가 창단 10주년을 맞는 내년에 무대에서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봅니다. 



*참고 

“고통을 성찰해 타인의 삶을 끌어안는 것이 연극”: 연극 ‘비명자들’ 연작의 극작가 겸 연출가 이해성 극단 고래 대표, <주간동아>, 2019.3.26 (http://weekly.donga.com/3/all/11/167776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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