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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n 01. 2019

호프Hoffe는 어떻게 호프Hope로 다시 태어났나

뮤지컬 <호프HOPE>가 보여주는 문학적 상상력의 힘 


 지난해 8월, 이스라엘 에바 호프(Eva Hoffe)가 8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두었다는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그녀의 사망 소식이 화젯거리가 된 것은 이스라엘 법정과 38년동안 이어진 길고 긴 소송 때문이었습니다. 프란츠 카프카(Franz Kafka)의 유작을 소유하는 정당성을 주장하는 호프의 가족과 자신들에게 그 권리를 이관해야 한다는 이스라엘 국립 도서관과의 치열한 법정 싸움은 결국 2016년 대법원의 판결로 끝이 났습니다. 대법원은 카프카의 미발표 원고를 국가가 소유하고 모두에게 공개함으로써 그의 문학이 모두의 것이 되어야 한다고 판결 내렸습니다. [1]


프란츠 카프카(좌)와 그의 유작을 소유했던 에바 호프와 막스 브로드(우). (출처:wikipedia, jewish journal)


 에바 호프의 어머니 에스더 호퍼(Esther Hoffe)는 막스 브로드(Max Brod)의 비서였습니다. 체코 태생의 막스 브로드는 작가·평론가이자 카프카의 절친한 친구였습니다. 카프카는 브로드에게 자신이 죽으면 태워서 없애달라고 부탁하며 작품을 맡겼지만, 그 진가를 알아본 브로드는 끝까지 원고를 지켜냅니다. 2차대전 당시 독일의 유태인 말살이 시작되면서 브로드와 호프는 이스라엘로 도망쳤고, 그곳에서 카프카의 유작들을 정리해 출판하면서 카프카는 물론 브로드까지 세계적으로 유명해지게 됩니다. 자식이 없었던 브로드는 함께 일을 했던 비서 호퍼에게 죽기 전 자신이 가지고 있던 유작 일부를 맡기게 됩니다. 이것이 호프가(家)로 카프카의 유작이 넘어가게 된 역사입니다. 


 법정에서는 브로드가 카프카의 작품이 대중에게 공개되기를 바란다는 유언과 호프의 독점 행위가 배치된다는 점, 호프가 원고 일부를 경매에 팔면서 경제적 이득을 얻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점이 공격을 받아왔습니다. 또한 원고들의 보존 상태가 좋지 못하다는 정황들까지를 종합적으로 참작하여 호프가가 세계의 중요한 문학자산을 가치 있게 다루지 않고 있다고 판단합니다. 대법원 상소까지 기각 당한 호프는 한 인터뷰에서 국가가 자신을 ‘거짓말쟁이에 돈만 밝히는 비정상적인 인간’으로 만들었다며 억울해했습니다. 언론의 보도와 공식적인 기록들에서 카프카 원고를 잃지 않으려는 호프의 모습은 그렇게 비춰질 수 밖에 없습니다. 호프의 법정 싸움은 진실이든 거짓이든, 어쩌면 아주 일부분의 사실이든지 간에 우리가 직접 그 안으로 들어가 판단할 수 없는 이야기이기 때문이죠. 그것은 제삼자의 매개로 들여다보고 전해 듣게 되는 저 편의 세계입니다. 






뮤지컬 <호프>에서 주인공 호프와 K. (출처:stagetalk!)

 



 그러나 여기 그 세계에 문학적 상상력을 덧입혀 탄생한 뮤지컬이 있습니다. 바로 뮤지컬 <호프>입니다. 실화의 주인공 이름 Hoffe 와 희망을 뜻하는 Hope, 같은 발음을 이용한 이 제목은 상상된 이야기를 통해 얻고자 했던 목표와도 비슷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마지막 공판이 진행되는 법정을 배경으로 시작되는 이 뮤지컬에는 늙고 더럽고 괴팍한 호프와 그녀가 가진 유작 원고가 의인화된 K가 중심이 됩니다. 법정에서 그녀에게 날아오는 질문들은 그녀로 하여금 오랜 과거의 몇 몇 장면으로 되돌아가게 만듭니다. 그녀의 회상 속에서 우리는 법정에서는 말해질 수 없는 구체적 상황들을 목격하게 됩니다. 개인의 삶에는 법의 세계에서 통용되지 못하는 말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명백한 증거들로 입증하지 못하는 사실들은 고려될 수 없습니다. 법이 구축한 한계 지어진 장소에서 개인은 언제나 취약한 존재로 서 있습니다. 


 물론 뮤지컬의 스토리에는 극적인 전개를 위해 허구의 캐릭터와 상황들이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허구의 기준도 ‘우리’가 알 수 있는 제한적인 사실에 기준을 두고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나 카프카와 브로드, 브로드와 에스더 호프, 에스더 호프와 에바 호프의 관계는 배역 요제프, 베르트, 마리, 호프로 극의 가장 기본적인 관계도를 구성하고 있습니다. 호프가 어째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면서 그 원고를 지키는데 집착하는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찬찬히 들여다봅니다. 베르트를 사랑했기에 딸인 호프보다 그가 맡긴 원고를 더 소중히 여겼던 엄마 마리. 사랑이 필요했던 호프는 그런 엄마를 원망하지만 전쟁이 휩쓸고 자신에게 남은 건 원고밖에 없다는 점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고 없이도 자신이 자신으로 다시 설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지만, 믿었던 카델에게도 원고로 배신당하고 녹록지 않은 세상에 계속 패배를 맛보면서 호프는 결국 증오했던 엄마의 모습과 똑같이 원고를 품에 안고 깊은 동굴 속으로 들어가버립니다. 



인터미션 없이 90분간 진행되는 뮤지컬은 잘 짜여진 구성과 아름다운 넘버를 자랑합니다. 무엇보다 배우들의 열연은 극을 빛나게 해주지요.




 ‘읽히지 않은 책과 읽히지 않은 인생’이란 부제는 뮤지컬의 목적이 호프(Hoffe)를 두둔하는 것이 아님을 암시합니다. 전쟁이란 역사적 비극을 통과하면서 자신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사람. 그래서 자신의 가치가 자기 자신에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소유한 물건을 통해 지켜질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 그 사람이 뒤늦게 물건을 대리해서가 아니라 스스로를 사랑하고 자기 자신으로 살아보겠다고 결심하게 되는 희망(Hope)의 순간을 보여주는 데 있는 것입니다. 자신에 대해 잊고 있는 문장이 너무 많다는, 수고했고 잘해왔고 사랑했으며 소중한 자신에 대한 문장을 다시 잘 읽어보겠다는 호프의 테마곡은 그래서 극 끝에 마음을 울립니다. 


 그리고 저는 이 뮤지컬이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를 차치하고서도 특별한 의미 있다고 믿습니다. 이 극 자체가 우리에게 도착하는, 납작해진 어떤 이야기에 섬세한 결을 되살리는 문학적 상상력의 힘을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특히 법정을 통과한 이야기들은 법의 건조하고 보수적인 언어로 기록되기 마련입니다. 영화 <아이캔스피크>의 할머니 옥분이 국제 법정에서 증언을 위해 상의를 걷어 올려, 법정의 언어 대신 몸의 증거로 대체할 수 밖에 없던 것처럼, 그곳의 언어는 개인이 가진 어떤 진실들은 전혀 건져 올리지 못하는 뜰채일 수 있습니다. 그런 이야기를 전해 들을 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태도를 상기시키는 힘이 <호프>에 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1] 호프가(家)와 이스라엘 도서관과의 소송을 개괄적으로 정리한 HAARETZ사의 <Eva Hoffe, Original Heiress of Kafka Letters Forced to Give Them to Israel’s National Library, Dies at 85> 기사(2018.08.05) 참고. (https://www.haaretz.com/israel-news/.premium-eva-hoffe-original-heiress-of-kafka-letters-dies-at-85-1.63422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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