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Sep 29. 2019

반 고흐의 노란 밀밭

삶과 죽음이 공존했던 그의 풍경


반 고흐에게 색은 단순히 대상을 모사하는 수단이 아닙니다. 그는 색깔에 느낌을 반영하고 감정을 불어넣습니다.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익숙한 대상과 풍경들을 새롭게 체험합니다. 캔버스에 실제와 다른 색채와 질감으로 그려진 건 대상 뿐만 아니라 그 대상을 그리던 반 고흐의 마음까지니까요. 선명하게 대립되는 색들과 굵고 거친 터치는 작품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을 더욱 강렬하게 끌어올립니다. 저는 그의 작품 앞에 설 때마다 속수무책으로 그 감정의 출렁임에 휩쓸린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1888) <밤의 카페 테라스>로 불리기도 한다. (https://painting-planet.com/cafe-terrace-at-night)


 반 고흐의 대표작 <별이 빛나는 밤에>,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에>,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에서 밤하늘은 정말 아름답습니다. 별빛이 반짝이며 넘실거리는 밤하늘은 마치 우주의 바다처럼 보이지요. 그래서 많은 이들이 유독 이 작품들을 사랑하는 것인지도 모르겠습습니다. 저 또한 고흐의 밤하늘을 사랑하긴 하지만 그보다 더 마음을 사로잡힌 풍광은 따로 있습니다. 바로 밀밭이에요. 반고흐는 자연을 사랑했고 자연과 가깝게 맞닿아있는 농민의 삶을 이상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농부를 즐겨 그렸고, 밀밭을 배경으로 한 작품도 꽤 많습니다. 샛노란 밀이 출렁이는 밭의 풍경은 밤하늘과는 또 다른 느낌이예요. 고흐가 그리는 밤하늘에 경이와 고독이 뒤섞여 있다면, 밀밭은 진정한 생명력이 응축된 것 같죠. 


<수확하는 농부>(1889)

 벨루어 호훼 국립공원 안에 위치한 크륄러뮐러 미술관(Kröller-Müller Museum)의 반 고흐관의 대표작은 <아를르의 포룸 광장의 카페 테라스> 입니다. 많은 이들이 작품 앞에서 쉽게 떠나지 못했고 저 역시 마찬가지였어요. 그러나 사람들이 그다지 주목하지 않았던 <수확하는 농부> 앞에서 전 더 오래 머물렀습니다. 농부가 밀을 베고 있는 밀밭은 가을 햇빛의 따스함까지 흡수해 반짝이고 있었습니다. 다 익어 영근 밀의 노란 색채는 풍요 그 자체였습니다. 반 고흐를 사로잡았을 게 분명한 햇빛과 대지, 그리고 노동에서 오는 즐거움- 이 모든 건강한 힘들이 화폭에 넘쳐 흘렀지요. 저는 작품이 머금은 생명과 풍요의 힘들을 제 안에 천천히 옮겨담았습니다. 






그리고 며칠 뒤, 저는 암스테르담 반고흐 미술관에서 그가 그린 또다른 밀밭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밀밭은 마르고 시든, 황폐한 풍광이었습니다. 사실 <까미귀가 있는 밀밭> 은 제가 처음 그 미술관을 찾았을 때 한참 바라보며 눈물을 훔친 작품이었어요. 그런데 8년이 지나 다시 보게 되었을 때 먹먹함이 차올라 다시 눈물이 났습니다. 그건 바로 며칠 전 보았던 밀밭의 풍경이 인상에 선명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생명과 풍요가 넘쳐 흐르던 샛노란 밀밭이 이 작품에선 어떠한 삶의 기쁨도 느껴지지 않고, 스산한 바람에 맥 없이 떨고 있었습니다. 그건 분면 반 고흐가 투영된 풍경이었죠. 그가 말년에 통과한 시련과 고통이 노란 물감이 묻은 붓 끝으로 꾹꾹 눌려 빼곡하게 차 있었습니다. 



<까마귀가 있는 밀밭> (1890)


 저는 의례 두 작품을 그린 반 고흐 사이에 큰 간극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작품이 그려진 연도를 확인하고 짐작이 틀렸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수확하는 농부>를 그릴 당시의 반 고흐는 삶의 에너지가 넘치는 긍정적인 사람이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실은 그가 한쪽 귀를 자르고 환각에 시달리며 병원 신세를 지고 있을 때였습니다. Saint-Remy의 정신병원에서 외출을 제한받았던 그가 밀레의 그림을 모사하며 기획했던 연작 중 하나라고 해요. 반 고흐는 병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들을 주로 그렸는데,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밀의 수확은 죽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하지만, 한편으론 태양의 금빛 아래서 맞이하기 때문에 슬프지 않은 죽음이라고씁니다. (위키백과 참고) 이때까지만해도 반 고흐에게 생에 대한 의지가 남아있던 건 아닐까, 저는 조심스레 생각해봅니다. 


  그랬던 비상한 천재가 몇달 뒤 만난 건 죽음의 기운이 내려앉은 밀밭입니다. 하늘은 별빛 하나 없는 밤이든지, 구름 낀 흐린 낮이든지 어느 편이든 우울한 암흑. 반 고흐는 성스러운 삶의 에너지를 품었던 밀밭에서 세 갈래로 갈라지는 길을 만났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그는 자신 앞에 나 있는 길들이 결국 그 자신을 어디로 이끌지 느꼈을까요. 이리로 오는 것인지 저리로 사라지는 것인지 모를 까마귀 떼들마저도 길잡이는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이 그림을 그렸던 달,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합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교란과 저항의 '무정형 가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