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Nov 28. 2019

다정도 병인 양하여

나는 착하다. 아니, 잠시만. 착하거나 악하다는 구분은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질 수 있으니 일반화한 문장에는 적합하지 않다. 차라리 이렇게 말하는 게 나을 듯 하다. 나는 다정하다. 정을 주고 친절한 데 있어 종종 과도하다거나 미련하다는 비난을 받곤 하니, 내가 다정하다는 걸 나도 잘 안다. 내가 가진 다정多情이 너무 지나친 건진 아직 모르겠다. 아직까지는 모른다. 그러나 설사 알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 다정을 내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다. 그게 가능했다면 나는 몇 차례의 상처를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거다. 마음이 그런거 아닌가. 내가 가진 것 중 가장 내 뜻대로 조절할 수 없는 거. 말 안듣고 속 썪이는 1등.


내가 왜 갑자기 이 문장을 떠올렸을까. 너무 다정해서 상처 받았던 일들을 하소연 하려던 건 아니었다. 지금까지 써온 논문 페이지가 오래동안 멈춰있기 때문이다. 그제도, 어제도,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도서관이 폐관할 때까지 노트북 앞에 앉아 있었는데도. 지난 노트들과 참고 자료들을 다시 뒤적여보고, 서가를 천천히 돌며 기분 전환을 해봐도. 입맛도 잃고 무기력하게 앉아 꿈뻑거리는 커서를 바라본다. 자료조사는 끝났고, 그것들을 정렬하여 담론의 장에 배치하는 일까지도 마쳤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무엇을 말해야 하는지 모르겠다는 거다. 정확하게는 이것들의 목소리를 통해 내가 해야하는 주장에 확신을 갖지 못하겠다는 거다. 지금 나는 내 목소리를 잃었다.


나는 공감을 잘한다. 감정이입의 왕이다. 대화에서 주로 청자가 되고, 엄청 끄덕이고 맞장구도 잘 친다. 요즘은 가을을 타나, 드라마를 보고 울고 소설을 읽어도 울고 뉴스나 신문기사 때문에 울기도 했다. 내가 많이 하는 말 중 하나가 '이해할 수 있어'다. 누군가의 말을 주의깊게 들으면 나는 상대방이 처한 상황과 그의 위치에 잠시 다녀온 느낌이 들고, 그가 가진 생각과 느낌이 그럴 수 밖에 없었다고 단번에 믿게 된다. 내가 상대방을 '이해했다고' 느끼는 거다. 물론 나의 착각일 수 있다. 기만일 가능성도 높다. 가끔 나는 나의 이러한 면이 조건반사적인 태도가 아닌가 생각해보기도 한다. 누구든, 모두를 이해하고 싶은 내가 무의식적으로 동일한 결과값을 입력해놓은 건 아닌지 의심이 들 때가 있었다.


이런 태도는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만 나오는게 아니다. 공적인 업무에서도, 심지어 공부를 할 때도 나는 일단 끄덕이는 것이다. 이 저자의 책을 읽어도 고개를 끄덕이고, 그 책을 비난하는 이론가의 논문을 읽어도 옳다쿠나 한다. 연구를 할 때 '이해할 수 있어'의 능력은 중요한 것이다. 모르면 아무것도 시작할 수 없으니까. 그런데 위험은 '이해할 수 있어'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지 못할 경우다. 나의 '문제의식'이 없으면 기존 지식과의 비판적인 거리두기가 불가능하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상가와 연구자들이 이론을 축적해왔고 중요한 담론을 생성해왔다. 그  과거 속에서 생산적인 논의가 시작되려면 '이해할 수 있어' 다음에 '그런데 나는' 이 이어져야 한다. 나는 지금, '그런데 나는'... 에서 멈춰있다.    


그러니까 그 지점에 멈춰 서서 답답한 맘에, 다정이 문제인 건 아닌지 생각해본 것이다. 진지하게 말고 귀여운 푸념 정도로 여겨주면 된다. 내용은 유치하지만 그러나 여기에 담은 속상한 마음은 진실하다. 그 마음의 강도마저 가볍게 치부하진 않았으면 좋겠다. 오죽 답답했으면 이런 글을 쓰면서까지 자신을 달래고 싶었겠는가. 삼일간 아무 문장도 쓰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은 이렇게라도 내가 여전히 뭔가를 쓸 수 있음을 확인하고 싶었다. 이제 곧 도서관 불이 꺼질 테니 오늘은 글렀다. 내일은 다정을 좀 털어 삐딱하고 적대적인 눈을 하고선 도서관에 와야 겠다. 그러고보면 다정도 병인 거 맞다. 적어도 내게는.           



매거진의 이전글 나는 다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