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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Oct 27. 2019

나는 다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나는 괜찮아. 
그러니 어서 가. 
미안해 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너에게, 그리고 나에게. 




 그날 새벽. 이상하리만치 잠이 오지 않던 밤. 나는 내가 무언가를 계속 기다리고 있다고 느꼈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혹은 그게 무엇인지 몰라서, 이상한 좌절감에 젖어있었지. 그때 마침 너를 본거야. 너무 순식간이라 나는 내가 본 것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어. 그걸 본 이상 내 안에서 후폭풍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하게 몰아칠거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기에 황급히 그걸 덮고 가능한 한 멀리 도망치려 했어. 그러나 너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시치미를 뗀 채 다시 너로 돌아왔어. 무엇일까. 내가 그 순간. 명확하진 않지만 분명히 보았던 너, 다른 너, 내가 전혀 모르는 너. 이제 너의 인생에 내가 다시 들어설 수 없다는 선언. 너는 왜 스스로 그 자랑스런 미래를 공표하는 걸 관두었을까. 너답지 않게 말야. 


 어젯밤 한강에 나갔어. 후리스의 지퍼를 목 끝까지 올렸는데도 속에 반팔을 입어선지 팔이 시렸어. 고작 일주일 사이에 기온이 확연히 달라졌더라. 북적이던 인파는 온데간데없이 추위에 단단히 무장한 산책자만 간간히 스쳐갔어. 쓸쓸하고 적막한 풍경에 그 길 위를 걷는 나도 속도를 내기 어렵더구나. 평소 같았으면 힘차게 달렸겠지만 후리스를 손끝까지 내려 빠지지 않도록 주먹을 꽉 쥐고선 춥고 고요한 밤을 천천히 걸었어. 가을은 내게 얼마나 머물렀던 것일까. 나는 이미 겨울로 밀려난 것 같아.


 어제도 금방 잠이 들 것 같지 않아 d의 이야기를 읽었어. 침대에 누워서도 차갑던 한강의 풍경이 떠나질 않아서 d의 이야기를 소리내어 읽었어. 그게 나의 외로움을 덜어줄까봐, 침실의 온도를 조금 높여줄까봐. 사물이 마치 생명체마냥 미지근한 온기를 가진걸 느끼게 된 d를 보며, 그건 외로움 때문이었을까, 생각해봤어. 내 고독한 낭독은 d가 dd가 죽었다고 알릴 때 끝났어. 버스 사고로 도로로 튕겨나간 dd와 dd가 남기고 간 사물들을 정리한 후 계속 물건들을 때려부시기만 했다는 d의 이야기를 도저히 소리내어 읽을 수 없었어. 그 고통스런 이야기를 내 적막한 밤에 위로로 삼을 수 없었거든. 소리를 삼켰는데, 몸이 아렸어. 침대 위에 편안히 누워있는데도. 나는 책을 덮고 스탠드를 껐어. 



침대 머리맡 테이블-황정은의 <디디의 우산>, 창비(2019). 다홍색 표지에는 dd가 d의 존재감을 처음 깨닫게 된 사물-우산이 그려져 있다.

 


 오늘은 정오의 햇빛 아래에서도 춥더라. 나름 도톰한 티를 입었는데도 팔이 시려 양팔을 꼭 껴안아야 했어. 사람이 바글바글한 망원시장을 통과해 걸었지. 부주의한 이들의 어깨에, 팔에, 잔뜩 채운 장가방에 내 몸을 치이며. 사물의 미온을 끔찍히 여겼던 d는 타인의 접촉과 체온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내가 남몰래 위안을 받았던, 사람 사이의 무신경한 충돌들을. 한참 걷고 나는 기분이 조금 나아졌어. 이제 곧 겨울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 난 추운게 끔찍히 싫지만 겨울은 매번 돌아오고 난 그걸 버텨야해. 삶에 가장 적절한 접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럼. 한땐 '그러나', '그래도'를 붙잡고 오기를 부렸지만 이젠 부질없는 시도란 걸 알아. 고집을 부리는 쪽만 힘겹더라고.  


 그러니까, 나는 괜찮아. 


 누구의 잘못이랄 게 없지 않니, 우리의 지금에. 우리가 서로 등을 대고 멀어지든 나란히 걸어가며 평행선을 그리든, 확실한건 우리 다시는 만나지 않을거란 거야. 그러니 최선을 다해 서로의 길을 가자. 이제 우리 사이에 미안해할 일도, 상대방의 사과가 필요할 일도 없으니까. 같은 온기도 누군가에겐 견딜 수 없고 누군가에겐 견딜만한 이유가 돼. 타인의 무심한 행위들이 기쁨을 만들어내는 확률과 지나친 배려가 비참을 만드는 확률은 비슷할지도 몰라. 그러니 어서 가렴. 나는 다만 겨울을 준비하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살거야.  




추워진 후로 한산한 한강공원. 기온이 내려가며 노을녘도 시린 풍경이 되고. 망원시장을 걸어오는 길에 수치심은 느끼지 말라고 얘기하는 주차금지판을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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