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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01. 2020

새해를 맞이하며 걸었던 길 위에서

친숙했던 풍경이 낯설어지고 내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는 체험

 2019년의 마지막 날은 몹시 추웠습니다. 세밑한파라고들 허더군요. 한동안 온화한 겨울날이 이어졌기 때문에 더 혹독하게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31일 아침의 기온은 영하 11도로 곤두박질쳤고 낮에도 영상으로 올라올 줄 몰랐습니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러 나갔던 저는 돌아오는 길에 양손 가득 장을 봐야겠다는 결심을 포기해야 했죠. 장갑 없는 맨손을 호주머니 밖으로 꺼내는 게 어려웠으니까요. 그러나 밤이 되자 한해가 끝나고 새로운 해가 온다는 멜랑콜리한 감정때문에 걷고 싶어졌습니다. 막상 걷고 싶다는 마음이 강해지자 추위따윈 아무래도 상관 없었어요. 머리부터 발끝까지 가장 두터운 것들로 무장하고 집을 나섰습니다. 한해가 끝나기 1시간 전.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기 1시간 전이었습니다. 



 어둠이 내려앉은 불광천은 고요했습니다. 계절과 시간을 불문하고 산책을 하거나 운동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던 하천가에는 인적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홍제천과 합류하여 한강공원으로 나가는 길에서도 그 흔한 자전거 한대 만나지 못했구요. 한해가 저무는 막바지, 텅 빈 길 위를 걷는 느낌은 기이했습니다. 수백번은 더 걸었던 익숙한 그 길이 그토록 낯설게 느껴졌던 게 처음이었으니 말이예요. 한강에 다다랐을 때 탁트인 서울의 전경에는 날선 바람과 수면 위에 아롱 번지는 불빛뿐. 아무도 없었습니다. 고가도로를 달리는 거센 차 소리만 끊임없이 울렸습니다. 





 그렇게 한참을 우두커니 한강 앞에 서 있었습니다. 걸음을 재촉한 덕분에 체온은 올라있었고 코 끝이 시려운 것 빼고는 견딜만한 추위였습니다. 길고 먼 산책길에서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는 사실. 친숙한 길이 별안간 낯설게 다가오는 체험. 이 모든게 새해의 삶을 생각하게 해주었습니다. 17년, 18년, 19년. 늘 해오던 것들을 다가올 20년에도 이어갈 것입니다. 중요한건 안일한 태도와 타성에 젖어 ‘당연하고 똑같은 일’로 해치우지 않는 것이겠지요. 새로운 자극 없이는 변화도 없고 난관과 위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발전도 없으니까요. 해오던 것들을 한층 더 멋지게 해내보이는 것. 그것이 새해의 대단하지 않지만 중요한 다짐 중 하나 아닐까요. 물론 삶의 여정은 텅 빈 한강처럼 외롭겠지만. 오롯이 혼자임의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 때 그 풍경은 나만이 개척한 인생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겠지요. 


 며칠 전 심보선 시인의 수필집 <그쪽의 풍경은 환한가>를 읽었습니다. 캄캄한 길을 뒤돌아 걸어오며 서문에서 읽었던 글귀를 떠올렸어요. 시인은 자신의 인생을 이끌었던 말을 제게 건넸습니다. 그건 시인의 아버지가 술에 취해 시인에게 했던 말이었어요. 


멋지게 사는 건 너무나 쉽다. 하지만 뭔가를 이루는 것, 그게 정말 어렵고 중요하다. 많은 사람이 나를 멋진 사람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말이다. 나는 인생에서 이룬 것이 하나도 없다. 아들아, 나는 실패자다. 명심해라. 멋지게 살려 하지 말고 무언가를 이루려 해라.



 열심히 그리고 성실히 살아온 19년의 끝에서 만난 이 말은 마음 한켠에 남은 아쉬움을 이해할 수 있게 해줬습니다. 새해에도 저는 씩씩하게 걸어온 길을 계속 걸어나갈 거예요. 그리고 올해만큼은 그 길 끝에, 혹은 그 길 위에서 소중한 결실을 만들어내겠다는 다짐을 합니다. 그동안 저의 부족함 혹은 신중함으로 어떤 일의 결론을 내고 완결짓는 것을 두려워했죠. 하지만 이제는 그럴 때가 되었어요. 무언가를 진정 이루는 일 말이예요. 더 대담한 용기와 결단으로 2020년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게 되니 갑자기 달리고 싶어졌고, 부푼 마음처럼 가벼워진 다리로 뜀박질을 시작했습니다. 죽은듯이 고요했던 강변에 타닥타닥, 저의 소리가 울리기 시작하더군요. 가쁜 숨으로 집에 도착했을 때 2019년은 거의 끝나있었습니다. 이내 2020년이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시작되었습니다. 



 모두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마음 속에 품은 크고 작은 소망들을 이루실 수 있는 용기와 끈기를 빌겠습니다. 우리, 우리의 무언가를 이뤄내어 한해의 끝에 뿌듯한 얼굴로 인사를 나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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