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Jan 08. 2020

포스트메모리를 구성하는 현재적 문제들 (2)

부산현대미술관 <시간 밖의 기록자들>

<동남아시아 비평사전>. 작품 정보에 '2017~'라고 적혀있듯이 시작은 있되 완성은 없는 작품. 작품길이 또한 '무한반복재생'으로 적혀 있다.  



 가장 돋보였던 작품은 호 추 니엔의 <동남아시아 비평사전>(The Critical Dictionary of Southeast Asia(CDOSEA)), (2017) 이었습니다. 작가는 각기 고유한 역사와 종교, 문화를 가진 나라들이 ‘동남아시아’라는 하나의 균등한 지역으로 다루어지는 것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아시아의 남동부 지역을 포괄하여 부르는 이 명칭은 사실 식민지 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아시아 대륙을 식민지화했던 서구 열강의 자의적인 기준에서 규정된 것이죠. 여기에는 식민주의와 더불어 타 문화/문명에 대한 몰이해가 기반이 되었습니다. 싱가포르 출신이면서 인접한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국가와의 복잡한 역사와 정세를 알고 있는 그는 서구가 규정한 ‘동아시아’라는 단일한 정체성의 의미가 무엇인지 묻습니다. 동아시아의 새로운 역사쓰기 실험이기도 한 <동남아시아 비평사전>를 통해서 말이죠.



 이 작품은 특정한 ‘알고리즘’에 의해 무작위로 선정되어 배열됩니다. 작가는 A부터 Z까지 26개의 알파벳에 동남아시아 역사와 관련한 단어들로 인덱스를 지정해 놓았습니다. 가령 A는 altitude와  anarchism, F는 fiction, friction, forest로 말이죠. 그리고 오프라인과 온라인 상의 동아시아에 대한 다양한 영상물과 이미지들을 데이터화하여, 특정한 ‘알고리즘’에 의해 각 인덱스와 일치하는 영상들이 자동 조합되어 작품을 이룹니다. 작가가 창조한 비평사전의 내용은 우연적이고 무규칙적으로 구성됩니다. 관람객들은 파편적인 이미지와 느슨한 서사, 불명확한 의미들에 의해 혼란을 겪으며, 하나의 지식이 형성되기까지 존재하는 모순을 목격하게 됩니다. 작가는 객관성을 자부했던 ‘백과사전’의 절대적인 권위와 폐쇄적인 의미의 장에 대항하는 열린 사전을 만든 것이죠.








발견된 이미지, 우연성, 비완결성 등이 초래하는 <비평사전>의 무작위성, 불확실성, 무정형성이라는 형식적 특징들은 완전한 지식 체계를 구축하려는 근대적 백과사전의 객관성을 전복시키며, 더는 확실히 알 수 있는 것이 전무한 오늘날, 역사적 진리, 진실, 지식의 가능성을 질문하고 탐색하는 사유실험의 토대가 된다. 이 지점에서 <비평사전>의 불완전성이 야기하는 불안, 모호성, 충돌과 같은 부정적 기제는, 이 사전이 응축하고 있는 수많은 기호들의 세계가 끊임없이 굴절되고, 혼합되며 보다 다각적으로 동남아시아를 사유하도록 추동시키는 비합리적 힘으로 작용한다.

                                                                                                                                                -작품 해설 중




 그러나 비평사전의 알고리즘은 흥미로운 지점이 있습니다. 조건에 따라 자동 편집되며 매번 각기 다른 조합이 만들어지기 때문에 미완성의 사전으로 지속되죠. 그러나 각 알파벳에 어떤 인덱스를 지정하느냐의 문제나, 알고리즘을 적용할 기본 데이터베이스에 어떤 영상물들을 보충할 것이냐 등의 작업에는 작가가 개입한다는 것이죠. 이러한 문제는 작가 또한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한 인터뷰에서 호 추 니엔은 ‘영상 선택 등을 ‘내가 통제하겠다’와 ‘그럼에도 통제되지 않는 것이 있다’는 것 사이의 긴장을 생각해봤다’고 답한 바 있습니다. 결국 개념과 담론 자체가 완벽한 자율성과 개방성은 갖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지만, 그 한계를 교묘히 은폐하기보다는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불확정성의 원리> 참여하는 호추니엔 감독" 씨네21(2017)인터뷰 참고)



이외에도 <비평사전>을 형상화한 <스퀘어 스택(얼굴들)>(2019)과 <두세 호랑이(2 or 3 Tigers>(2015) 등의 작품이 있다. 모두 동일한 문제의식을 관통하고 있음.



*호 추 니엔은 싱가포르 출신의 미디어 작가로 동남아시아의 식민지 시대, 종교 등의 역사적인 주제를 비판적으로 사유하는 영상 작업을 진행합니다. 한국에서는 이전부터 여러 전시에 참여하여 비중있는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2015년 광주아시아문화전당 개관 페스티벌에 <만마리의 호랑이> 작품이 처음 소개되었고, 2017년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의 ‘불확정성의 원리’ 전시에 <동남아시아 비평 사전 볼륨2: G for Ghost(Writer)>외 3개 작품으로 참가한 바 있죠. 2018 광주비엔날레 전에는 <이름없는 존재 & 이름>작품으로, 국립현대미술관의 ‘2018 다원예술: 아시아 포커스’에서는 ‘의문의 라이텍’을 공연으로 올리기도 했습니다. 호 추 니엔은 <미지의 구름>(2011), <여기 어딘가에>(2009) 등 장단편 영화를 찍기도 했습니다.




*웹상에서 실시간으로 <동아시아 비평사전>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언어로 자막을 제공하며 (아쉽지만 한국어는 안됩니다) a-z의 인덱스 정보를 제공합니다.

https://cdosea.org/포스트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불확정성의 원리> 참여하는 호추니엔 감독" 인터뷰 전문

메모리를 구성하는 현재적 문제들 (1)

매거진의 이전글 새해를 맞이하며 걸었던 길 위에서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