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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11. 2020

계란 껍질을 깨려면 힘을 줘야지!

계란찜기를 활용하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의 이야기



운좋게 계란찜기를 받았습니다. 삶은 달걀을 좋아하고 자주 먹어왔던 터라, 계란찜기의 존재를 알았을 때 하나 있으면 참 편하겠다는 생각은 해오고 있었죠. 그러나 딱히 없어도 생활에 지장이 없었으니(그렇습니다. 저의 구매욕은 쉽게 뿜뿌되지 않습니다) 저는 늘상 해오던 것처럼 양은냄비에 계란 3~4개를 정기적으로 삶을 뿐, 찜기를 사려는 특별한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지인에게 안쓰는 찜기를 선물로 받게된 거죠! 시중에 나와있는 계란 찜기 종류는 무척 다양한데, 제가 받은 건 적당한 가격대에 크지 않은 찜기였습니다. 원한다면 2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제품이라 채소를 푸짐하게 삶을 때도 편리하겠다, 내심 기뻤죠.

찜기는 삶을 계란의 갯수와 원하는 조리(반숙/완숙)상태에 따라 넣어야 하는 물의 양이 달랐습니다. 물을 조절할 수 있는 계랑컵이 동봉되어 있었고 컵 밑바닥에는 송곳처럼 작게 심이 솟아있습니다. 사용설명서를 읽으니 그 심으로 계란의 윗부분에 작은 구멍을 내라고 쓰여 있었어요. 제품의 플러그를 콘센트에 꼽고, 전원 버튼을 켜라는 안내와 나란히 쓰여 있어서 단순한 일이려니 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날계란을 들고 계량컵으로 구멍을 뚫으려니 무서웠어요. 힘주어 구멍을 뚫다가 계란이 산산조각나면 어떡하냐구요! 


찜기의 아담한 사이즈와 나를 혼란에 빠트린 설명서의 안내2. 




장을 보고 올 때 가장 조심하는 건 계란입니다. 보통 10~15구짜리 판을 사는데, 저는 엄마아빠의 핀잔에도 불구하고 계란을 장바구니 맨 위에 놓아 다른 재료들에 눌리지 않게 신경썼어요. 심지어 쌈채소나 과자봉지 같은 것보다도 위에 두었죠. 장을 보고 집으로 가는 길에 계란을 깨트린 경험이 있어서, 노른자와 흰자가 다른 물건들과 범벅이 되어 장바구니 전체가 엉망이 된 끔찍한 기억 때문이었습니다. 과일이나 채소야 조금 눌려도 개의치 않고 먹으면 그만이지만 깨진 계란은 절대 되돌릴 수 없잖아요. 그래서 날계란을 우선순위로 삼아 깨지지 않게 수호해오던 습관이 여전히 손끝에도 살아 있었나봅니다. 혹시나 계란이 깨지면 어쩌나하는 두려움에 계량컵을 힘주어 찌르지 못하고 살살 표면만 긁다가 결국 포기했지요. 구멍을 뚫지 않는 대신 물을 배로 넣어 찜기를 사용했습니다. 그렇게 삶은 계란은 그럭저럭 괜찮았어요. 

그로부터 몇 주 후. 부모님이 저희 집에 방문했을 때 저는 부모님 또한 비슷한 계란찜기를 사용하고 있단 사실이 기억이 났어요. 그리고 날계란에 어떻게 구멍을 뚫을 수 있는지 심각하게 여쭈어보았죠. 아버지는 그런 질문을 진지하게 하는 저를 어처구니 없게 바라보셨습니다. 그리고 날계란을 계량컵으로 펑! 심지어 저는 아버지의 거침없는 행동에 “어, 아빠!! 그렇게 하다 깨지면 어떡해요, 밑에 수건!!”하고 호들갑을 떨다 귀까지 막았더랍니다. 조그마한 구멍이 뚫린 날계란을 건네는 아버지의 표정은 의기양양했습니다. “구멍을 뚫을려면 힘을 줘서 해야지. 너무 당연한거 아니냐?” 

계량컵 아랫면에 작은 심지로 계란 위를 힘.주.어. 누르면 요렇게 뾱 하고 작은 구멍이 생겨요. 소심한 저는 못 만들었던 구멍..


그렇습니다. 너무 당연한 일이죠. 그러나 겁이 나는걸 어떡하나요. 아마도 날계란에 대한 안좋은 기억과 학습된 공포 때문일거예요. 한편으론 저의 성향 탓인지도 모른겠습니다. 저는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면 그대로 유지하려는 관성이 강해요(글 서두에서 밝힌 소비 패턴과도 비슷하죠?). 일적으로나 학업적으로 꽤나 대담한 기획들을 하고 도전적인데 비해 의외로 일상의 삶에서는 획기적인 변화를 만드는데 적극적이지 않습니다. 매일 아침 요가를 하고 커피를 내려 도서관에 가는, 하루에 몇 자 이상의 글을 쓰고 일주일에 한 권의 책을 읽으며 두 편의 영화를 보는, 오랫동안 나의 일상이 유지했던 리듬을 잃고 싶어하지 않는 거겠죠. 다소 소심하고 방어적으로 저를 지키려는 태도라고나 할까요.

아버지의 냉철한 분석(여동생은 모험심이 강해 대책없이 기계를 분해하거나 장비를 설치해보는 등등의 가정 하드웨어 개척의 프론티어를 맡아왔음. ‘일단’ 지르거나 ‘일단’ 해본다는 정신이 분명 강했습니다. 네, 저는 그 옆에서 감탄하며 박수치는 역할을 해왔구요)도 일견 맞는 것 같습니다. 사람의 성향은 옳고 그름의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지만. 이번 계기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지금 이대로도 충분히 좋아 시도하지 않는 변화가 있을까? 손에 쥐고 있는 지금의 행복이 깨질까봐 더 나아질 수 있는 미래를 거머쥘 수 있는 손에 힘을 주지 못하고 있는건 아닐까? 어떤 관성은 오랜 평화를 지키는 장점보다 새로운 행복의 앞길을 막는 단점이 되는 것은 아닐까, 하구요.

뭐, 어쨌든 겁 많고 소심한 저는 이제 날계란에 힘주어 구멍을 뚫고 찜기를 잘 사용하고 있습니다.좋아하는 반숙 계란으로 샐러드를 해먹는 새로운 기쁨과 함께요. 2020년에는 힘을 더 많이 줄까봐요. 새로운 기회들을 붙잡을 수 있는 편의 손에요. 익숙한 것들에서 조금 빗겨나면 얼마나 낯설고 설레는 행복이 기다릴지 아무도 모를 일이니까요.



찜기로 간편하게 반숙! 갑분찜기홍보? 혹은 홈테이블자랑? 결론은 냠냠 계란은 맛있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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