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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Mar 04. 2020

용서의 가능성을 찾는 용기있는 여정

두산아트랩 2020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

 르완다대학살의 피해자인 투치족 무카루만지는 그녀의 가족들을 죽이고 그녀 또한 무참히 공격했던 후투족 느탐바라를 용서합니다.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려 했던 학살자를 그녀는 어떻게 용서하고 그와 가족처럼 지낼 수 있던 걸까요.[1] 연극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는 ‘평생을 뒤흔드는 미움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서 시작합니다. 연출가는 무카루만지의 용서가 가능했던 이유를 알아내기 위해 그녀의 상황에 자신을 밀어넣는 대신 비교적 헤아리기 쉬운 그 자신의 마음에서 출발합니다. 바로 자신이 가진 가장 깊은 미움의 기억들을 끄집어내는 시도를 통해 말이죠.


 이 극은 기본적으로 녹취록에 기록된 무카루만지와 느탐바라의 말들을 무대 위에서 되살립니다.  그리고 두 인물의 대화 사이사이에 배우들 각자의 사적인 고백들이 얽혀들어갑니다. 그들은 인생에서 가장 큰 분노, 비참, 슬픔, 공포의 기억을 끄집어냅니다. 이때만큼 그들은 배역을 연기하는 배우가 아니라 진솔한 그들 그 자체로 무대에 서게 되는 거죠. 그들의 목소리는 격양되어 있고 간혹 울먹이기도 합니다. 트라우마적 기억은 그들의 삶 기저에 엎드려 보이지 않다가 결정적인 순간 여전한 강도의 괴로움으로 살아납니다. 그들은 관객에게, 또 그들 자신에게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합니다. 가장 끔찍한 고통을 줬던 가해자를 우리는 용서할 수 있을까요?    




EBS 다큐프라임 <제노사이드>편에서 다룬 무카루만지와 느탐바라의 이야기. (사진 출처: https://blog.naver.com/ebsstory/221622106292)

 



 용서를 구하려는 느탐바라는 무카루만지의 외면에도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찾아갑니다. 그녀의 이마, 어깨, 배.. 신체 곳곳에는 느탐바라가 휘두른 칼을 비롯해 학살의 공격들이 여전히 남아있죠. 몸에 남겨진, 되돌릴 수 없는 폭력의 흔적처럼 무카루만지의 공포, 분노, 슬픔 또한 완전히 치유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카루만지는 그녀를 공격했던 순간을 기억한다는 느탐바라의 말에 흔들립니다. 그리고 그가 그의 아내까지 집에 데려와 용서를 구하는 순간 용서해야겠다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사실 이들의 용서 이야기는 단순하지 않습니다. 식민주의의 잔재, 인종과 부족의 인위적 구별과 차별, 학살 이후 국민을 통합시켜야했던 국가적 요구까지.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했다는 단순한 차원의 접근은 이 두 사람이 놓인 상황의 다층적인 문맥들을 읽는데 실패하지요. 연극은 배우들의 미시 이야기에 집중하면서, 그리고 다소 헐겁게 무카루만지와 배우들을 등치시키면서 아쉽게도 무카루만지와 느탐바라간의 용서를 깊게 다루지는 못합니다. 


 다만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는 이 사건을 사회학적으로 분석하고 재현하려 하지않습니다. 이 연극을 ‘다큐멘터리 극’[2]이라고 소개하는 데서 보여지듯이, 이 사건을 중심으로 용서에 이르는 과정을 이해보려고 노력하는 배우들의 이야기에 더 가깝습니다. 연출가는 이 연극을 준비하며 배우들이 괴로운 기억과 마주하고 또 그 이야기를 함께 말하고 듣는 작업에 노력을 기울였다고 설명합니다. 용서의 매커니즘을 이해하려는 시도가 ‘나는 나에게 가장 큰 상처를 입힌 사람을 용서할 수 있느냐’의 문제로 옮겨간 것이죠. 이들이 가능성을 묻는 용서는 무카루만지의 용서와는 분명 결이 다릅니다. 또한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자신의 제한된 경험을 바탕으로 공감을 확장시키는 방식도 문제적일 수 있지요. 그러나 이들의 여정이 향했던 지점은 용서를 한 주체를 억압하는 부정적인 감정과 인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힘으로 보는 관점인 듯 합니다. 고통과 피해의 경중이나 가해 관계의 종류를 떠나 용서는 주체의 결단이고 의지의 산물이라는 점을요. [3]


 교육심리학과 교수이자 용서심리학 분야의 대가로 평가받는 엔라이트(Robert D. Enright). 그는 대표작『용서치유-용서는 선택이다』에서 용서를 이렇게 정의합니다.

 “부당하게 상처를 받았을 경우, 복수하고 싶어하는 권리를 부정하는 심정에서 복수심을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에게 열정과 자비, 그리고 사랑을 제공하려고 노력함으로써 분노를 극복하려 한다면 용서가 가능하다.”[4] 


이는 영국의 철학자 노스(Joanne North)의 정의를 차용한 것입니다. 즉, 용서의 첫 단계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이에게 가지게 되는 부정적인 감정과 판단을 극복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변화는 무관하게 나의 내면에서부터 시작하는 거죠. 그리고 반드시 자비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는 가해자에게까지 자비를 베푸는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나와 나를 둘러싼 관계를 변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나의 의지와 용기가 필요한 작업이 바로 용서입니다.



연극이 끝나고 진행된 아티스트 토크의 현장. (2020.2.21) 추태엽 연출가 및 배우 9인. 



 이 연극에서 흥미로웠던 지점은 감응의 힘입니다. 70분의 쇼케이스가 끝나고 연출가와 배우들이 함께하는 토크 시간이 있었습니다. 관객들의 감상과 질문을 들으면서 많은 이들이 배우들의 사적 서사와 감정에 동요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극의 서사나 구성, 컨셉에 대한 지적이나 아쉬움과는 별개로, 트라우마적 기억을 힘겹게 마주하고 또 그것을 긍정적으로 의미화하려는 모습들은 실제로 커다란 정동의 효과를 미쳤습니다. 어떤 관객은 자발적으로 자신의 과거를 고백하며, 자신 역시 이를 극복해보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고요. 무대와 몇 뼘 정도밖에 떨어지지 않은 관객석은 그날 배우들의 용기와 의지가 전이된 듯 했습니다. 어쩌면 다큐멘터리 연극이 내재한 다층성 -과거와 현재, 재현과 참여, 허구와 실재 사이-이 있기에 가능했던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 EBS <다큐프레임> 제노사이드, 학살의 기억들편에는 독일 2차 대전의 유태인 학살과 캄보디아의 크메르 학살과 르완다의 학살이 다루어집니다. 여기서 무카루만지의 이야기가 소개되고요. 실제로 추태영 연출가도 이 다큐를 촬영할 때의 녹취록을 읽었다고 아티스트 토크에서 밝힌 바 있습니다. 유투브에서 이 편을 보실 수 있어요. 


[2] 다큐멘터리 연극은 일반적으로 공문서, 사진, 증언, 기사 등의 기록이 입증하는 역사적 혹은 동시대적 사건들을 다루는 형식을 통칭합니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자면 이 장르 안에서도 다큐멘터리 연극, 뉴다큐멘터리 연극, 포스트 다큐멘터리 연극 등으로 구분됩니다. 다음 편에서는 다큐멘터리 연극들의 다른 기원과 특징들을 정리해보겠습니다. 


[3] 연출노트 / 작가노트

<용서 할 수 없는 미움에 대해>

우리는 하루에도 수십, 수백 번씩 미움에 마음이 흔들립니다. 어떤 미움은 우리의 몇 분을 흔들어 놓지만 어떤 미움들은 하루를, 한 달을, 또 어떤 것들은 몇 년, 평생을 흔들어 놓습니다. 

무카루만지의 녹취록을 읽으며 내 평생의 미움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습니다. 그녀는 어떤 마음으로 그 미움을 용서하고 화해할 수 있었을까요. 나라면, 우리라면, 평생을 뒤흔드는 미움들을 용서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으로 용서의 마음에 다가가 보기로 했습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우리의 가장 깊은 미움의 기억들을 되새겨야 했습니다. 그 미움들을 눈앞에 둔 뒤 용서의 질문들을 던져야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들은 각자의 용서에 대한 해답을 찾아갔습니다. 결국 용서라는 것은 내 삶을 되찾기 위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 극은 무카루만지와 느탐바라의 화해 과정을 통해 우리의 미움을 들여다보며 그것에 용서의 질문을 던지기까지의 과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과정 기록극입니다. 


[4]  로버트 D.엔라이트, 역 채규만, 『용서치유-용서는 선택이다』, 학지사, 2004. 36쪽. 


[5] 두산아트랩은 2010년부터 시작된 두산아트센터의 신진 예술가 지원 프로젝트 중 하나입니다. 40세 이하 예술가들에게 쇼케이스, 독회, 워크숍 등 다양한 형식의 작품을 실험할 수 있도록 지원합니다. 두산아트센터에서 공연을 선보이게 되며 무료로 관람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일찍 매진되므로 예매를 서두를 것)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도 80분의 쇼케이스 형태로 올려졌기 때문에 본래 서사의 일부분만을 보여줄 수 밖에 없는 제약이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훗날 더 촘촘한 정극을 볼 수 있길 기대해봅니다.  



***연극 <내 죽음을 기억하시나요>

작: 추태영 백지영

연출: 추태영

출연: 이경훈 김수민 이창민 박석원 조수지 강수현 김설빈 김윤아 정아람

무대디자인: 이윤지

영상디자인: 이아단

쇼케이스 70분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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