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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21. 2020

03-나의 욕심은 욕심일뿐

논문의 연구목적과 욕심의 관계

  그날 밤, 나는 나의 욕심에 대해 생각했다. 논문 형식 안에서 세련되게 연구의 목적으로 말해지는 것. 연구 목적을 밝히는 장에서 나는 이렇게 썼다. 증언은 완벽하고 충분한 언어가 아니다. 증언에는 증언자가 말하지 못하는 사실들이 있기 마련이다. 현실의 수많은 제약들이 증언자가 온전히 말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서 사실과 의견, 감정의 용인된 범위를 초과한 말들은 이 실패에 놓이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연구자는 언어가 되지 못한 증언자의 말에 다가가야 한다. 실패한 증언을 들으려는 노력은 증언자가 놓인 억압적 조건과 한계를 바라보게 한다. 쉽게 말해질 수 없는 증언자의 고통과 불안, 두려움을 함께 짊어지려는 마음이기도 하다. 


 나는 말하기에 실패하거나 말하기를 거부한 사실들이 우리에게 ‘들려지는’ 일의 가치를 믿고 있었다. 그래서 나의 욕심을 욕심이 아니라 ‘선의’나 ‘정의’라고 여겼던 거다. 말하지 못하는 증언자에게, 증언자에게 특정 말을 검열하도록 암묵적으로 작용했던 사회에, 사회에서 소외받고 억울한 이들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하는 우리에게도. 나는 나의 욕심이 선한 영향력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거부된 말들이 말하여질 수 있도록 조력자가 되는 일도, 그 말들이 더 많은 이들에게 가닿을 수 있도록 매개자가 되는 일도, 그렇게 들려진 말들로 우리 사회의 이해 지평이 넓어지고 더 나은 방향으로 조금이라도 변할 수 있다면. 나는 그러한 역할을 하고 싶었던 거다. 그러나 할머니와의 갈등으로 나는 나의 욕심을 더이상 그럴듯하게 포장할 수 없었다. 그것은-특히 논문 밖에서는- 지극히 사적인 '욕심'이었던 것이다.


 논문을 쓰게 되기까지 그리고 쓰는 과정에서도 숱한 난관들이 있었다. 그러나 이 사건만큼 나와 이 연구를 근본적으로 뒤흔든 위기는 없었다. 5월인 당시 나는 이미 논문의 예비심사를 통과한 뒤였다. 예비심사에서 지적 받았던 부분들은 양 할머니의 따님과의 인터뷰를 통해 보완할 계획이라고 변호했었다. 심사위원들도 그 인터뷰가 결정적인 내용들을 추가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며 동의하셨다. 소중한 기회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꼼꼼하게 인터뷰를 준비하라는 격려 같은 조언도 주셨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인터뷰가 무산되리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든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나 이제와서 논문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논문 주제나 내용을 되돌리는 것도 불가능했다. 나는 제주에 머무른 남은 날동안 부지런히 할머니의 마을을 오갔다. 마을의 리사무소와 경로당 앞, 폭낭에 기약 없이 앉아 마을 어르신들과 만나는 우연을 기다렸다. 그렇게 하나둘 모은 어르신들과의 대화들을 자료로 하여 논문을 써내려갈 수 밖에 없었다. 일주일 남짓한 마지막 현지조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나는 밤을 새며 본문을 작성했다. 가완성된 논문을 본심 이주 전 지도교수님께 보여드렸다. 잔뜩 긴장한 채 연구실로 찾아갔을 때, 교수님의 첫 마디는 이러했다. 


 “읽을수록 기묘해. 이상하다고 밖에 표현할 수가 없네."


 나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아마 나도 모르게 미간이 살짝 찡그려졌을 것이다. 


"연구자의 실존적 고민이 전면에 드러나는 논문은 처음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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