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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24. 2020

04-실존적 고민이라뇨

들켜버린 나의 미숙함

 그날 면담에서 ‘실존적 고민’이 정확히 어떠한 것인지 교수님께 여쭤보지 않았다. 어쩌면 교수님도 구체적으로 특정하기 어려웠을지 모른다. 아마도 논문 전체가 자아내는 느낌의 차원이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뿐이었다. 다만 교수님의 지적은 논문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로 여겨지지 않았다. 논문은 소설도 아니고 에세이도 아니기 때문이다. 논문을 포함한 학술적인 글은 객관적인 정보와 이론이 중심이 된다. 연구자가 새로운 주장을 할 때에도 타당한 근거와 논리가 뒷받침되어야 한다. 연구자 스스로가 혼란스러워하거나 확신할 수 없다는 모습을 보이는 건 오히려 연구에 대한 신뢰를 약화시키기 쉽다.  


 양 할머니의 증언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게는 말하기를 에둘러 회피하거나 침묵하는 순간들이 도드라져 보였다. 할머니가 말하지 않은 사실이 무엇인지, 왜 말하지 못하는지의 이유는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할머니의 가족을 비롯해 주변 지인들을 인터뷰하면서 해답을 찾고자 했지만, 당사자가 아닌 이상 어떤 말도 정답일 수 없었다. 그들의 말은 나의 가정을 뒷받침해줄 때도 있는 반면 반대되는 경우도 많았다. 조사를 진행하고 할머니의 생에 대한 단서들을 모을수록 오히려 미궁에 빠지는 질문들이 생겨났다. 

 

 나의 예상과 어긋나는 것은 비단 가설만이 아니었다. 조사 자체도 계획과 달리 틀어질 때가 많았다. 할머니 따님이 인터뷰 당일 거부한 사건은 제일 큰 사건이었지만. 그 외에도 인터뷰에 집중을 안하시고 당신이 하고싶은 이야기만 늘어놓는 어르신이나 다시 만나기로 한 약속을 잊고 외출하신 어르신, 코로나에 대한 경계로 육지사람(제주도민들은 도외 사람을 이렇게 통칭해서 부르곤 한다)과는 만나지 않겠다는 분들까지. 현실은 나의 바람을 외면하고 좌절을 선물했다. 매우 자주. 


 돌발적인 사건이 발생하고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연루되고. 할머니의 증언에서 말해지지 못한 이야기를 꿰어맞춰줄 단서들은 저마다 다른 주장을 하고. 연구는 하나의 결론으로 수렴되지 못했다. 이러한 실패와 혼란을 논문 안에 어떻게 담아야 하는지 고민은 갈수록 커져갔다. 계속해서 새로운 질문이 생겨나는 연구 여정이 그대로 내용이 된 것이 내 논문의 특징이다. 연구자로 느낀 고민이 논문의 구성과 내용에 반영되었고 문장 구석구석에 묻어 있다. 학술적인 글에 익숙하지 않은 나로서는 다른 방도가 없었다. 분명 교수님의 눈에는 이단異端적인 글쓰기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기묘한 느낌'이 든다고 말씀하셨던 거고. 


 고백하자면 나는 논문을 쓰면서 기술적이나 내용적인 문제보다는 기억과 삶,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자꾸 미끄러졌다. 논문에는 커져가는 질문들을 담지는 않았지만. 그래서 논문을 쓰는 일이 더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런 질문에 붙들린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사실 내가 뒤늦게 대학원 진학을 결정하게 된 계기도 그러한 질문들과 마주하면서였다.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폴란드와 독일로 떠난 배낭여행 중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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