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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Aug 15. 2020

누구의 욕망을/으로 이야기하고 있나

제주 해녀를 다룬 다큐 <물숨>과 <해녀> 바라보기

 다큐멘터리 <물숨>(2016년 개봉)은 제주 출신의 고희영 감독이 7년 동안의 참여관찰 끝에 내놓을 수 있던 작품입니다. 감독은제주 성산포 남쪽 바다의 또 하나의 섬 우도를 택했습니다. 우도는 제주에서 해녀가 가장 많고 해녀에 의한 해산물 채취량도 가장 많은 곳이지요. 우도의 해녀 한 사람 한 사람과 천천히 관계를 만들어온 감독은 이야기의 통제권을 철저히 해녀들에게 내어줍니다. 다큐멘터리를 촬영하고 편집하는 일은 감독의 몫이지만 해녀로 살아가는 삶의 주인은 바로 그녀들이기 때문입니다. 오랜 시간 곁에서 함께 온 감독의 존재가 느껴질 만큼 다큐는 찬찬히, 보채거나 다그치지 않고 그녀들의 모습을 담고 말을 길어올립니다. 여기서 해녀에게 기대되는 일반적인 이미지-강인하고 독립적이면서도 지혜로운-만 강요되지 않습니다. 감독은 해녀에 대한 전형적인 기대를 버리고 그들을 바라보는데, 그 결과로 조명될 수 있던 것은 바로 해녀로서의 욕망입니다. 



“바다에 가면 다 욕심이 생기게 돼 있는거라. 처음엔 '욕심을 내지 말아야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물건이 더 욕심나게 사람을 만드는 거야."



 해녀들 사이에서 숨의 길이는 하늘이 점지해준다고 이야기됩니다. 잠수할 수 있는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기 때문에 노력과 의지로 극복할 수 없는 운명으로 보는 거죠. 숨의 길이를 포함해 물질의 전반적인 능력에 따라 해녀들은 상군/중군/하군으로 나뉩니다. 상군은 수심 1020m에서, 중군은 510m에서 작업합니다. 3~5m 수심에서 작업하는 하군은 똥군으로 부르기도 해요. 각자의 위계에 따라 다른 바다를 침범하지 않는 것은 해녀 세계의 규칙입니다. 해녀는 자신의 능력치에 따라 허락된 바다에서 평생을 머무릅니다. 그러나 이를 단순한 순응으로 볼 수만은 없습니다. 잠수를 하는 매 순간 그들은 이 숨을 조금 더 연장하려는 욕망과 치열하게 싸우기 때문입니다.

 


다큐멘터리 <물숨>의 스틸컷 (출처:네이버 영화)



 자신의 숨의 길이를 초과하여 바다에 있고자 하는 욕심. 그러한 욕망으로 자신의 숨을 다했을 때 들이키게 되는 숨을 ‘물숨’이라 합니다. 바다 속에서 물숨을 들이키는 것은 곧 죽음의 위험을 의미합니다.  ‘끊지 못한 욕망의 숨’이죠. 그래서 노련한 해녀들이 어린 해녀들을 가르칠 때 가장 먼저, 그리고 제일 중요하게 강조하는 것이 자신의 한계를 알고 그 한계를 넘어서려는 욕심을 다스리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바다와 오랫동안 상생할 수 있는 노동의 조건이기도 하며 동시에 스스로를 다스리며 살아가는 삶의 지혜 차원이기도 할 것입니다. 



 욕망을 다스리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그것이 생계와 직접적인 연관이 있을 때는 말이죠. 바다 밑에서 잡아 올린 해산물은 곧 수익입니다. 그렇게 번 돈으로 자식 교육을 시키고 생계를 이어갔다는 이야기는 해녀들의 자긍심이자 운명의 굴레이기도 하죠. 그렇기에 잠수를 하는 매순간은 욕망과의 치열한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노련한 실력의 해녀라도 발견한 전복이나 생선의 위치를 기억하고 다시 가서 잡지 못한다고 해요. 바다 속에 위치를 표시할 수 없을뿐더러 암초나 해초의 무더기가 비슷하게 보이면서도 또 시시각각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발견한 해산물을 본 즉시 잡지 못하면 놓치는 거라고 봐야 한대요. 만약 숨이 거의 다했을 때 발견한 전복을 캐려고 하다가 시간을 지체하면 위험에 처하는 거죠. 조급한 마음에 서두르다가 해초에 발이 걸리거나 보트의 줄에 얽히는 불상사가 생기기도 하고요. 거동이 힘든 고령의 해녀들도 벌이가 쏠쏠한 우뭇가사리를 따는 한철에 바다에 들어가는 모습 또한 이 욕망과 관련됩니다. 과욕을 부리다 결국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한 해녀들이 많다고 해요. <물숨>에서도 다시 돌아오지 못한 해녀의 넋들이 담겨있습니다.  



 그러니 해녀의 삶은 실상 더 위험하고 치열한 것이겠죠. 그러나 우리에게 해녀의 일반적인 이미지는 지나치게 미화된 결과처럼 보입니다. 바다의 질서를 위협하지 않는, 자연에 순응하는 해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잠수하는 강인한 제주의 어머니. 2016년 유네스코 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해녀는 제주 지역의 문화적 정체성, 공동체 문화, 자연친화적 노동의 관점에서 국제적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게 되었어요. 자연스럽게 해녀에 대한 이상적인 이미지는 더욱 강화되었죠. 물론 해녀의 긍정적인 가치와 의미를 조명하는 일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름답게만 포장된 이미지들로 인해 해녀들의 치열하고 취약한 삶의 이면들이 묻혀서는 안됩니다. 어두운 현실을 외면한 채 우리가 바라보고자 하는 ‘해녀다움’을 이들에게 요구하는 것은 폭력과도 같으니까요. 

 



 이러한 관점에서 다시 생각해보고 싶은 영상이 의류브랜드인 파타고니아가 제작한 제주 해녀 다큐멘터리 입니다. 이 영상은 파타고니아의 앰버서더이자 세계적인 프리다이버인 키미 워너 Kimmi Warner가 출산을 앞두고 제주 해녀와 가진 만남을 담고 있습니다. 그녀는 출산과 육아로 프리다이버로서의 경력이 단절될까봐 두려워하는데, 아이를 낳고 노년이 되어서도 계속 해녀로서 (직업과 삶이 분리되지 않은 채) 잠수하는 여성들을 보고 감탄합니다. 그리고 이들의 강인하고 독립적인 생에서부터 앞으로 자신도 어머니로서 직업여성으로서 잘 살아나갈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얻게 되죠. 






 제주 해녀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 의도된 왜곡은 없습니다. 영상 안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쾌활하며 활동적인 해녀들이 담겨있죠. 그러나 희망과 용기의 단서를 얻고 싶어서인지 그들이 매순간 마주하고 극복해야 했던 고통과 제약들은 말하지 않습니다. 만삭의 몸으로도, 출산을 하고도 채 회복이 되지 않은 몸으로 바다에 나가야 했던 것이 해녀의 자발적인 의지만은 아닐 텐데. 그들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조건들에 대해서는 관심을 가지지 않죠. 바라보고 싶은 면만을 바라본 결과물로 아름답게 포장된 다큐멘터리라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에 더 밀착하여 감독으로서의 선입견을 내려놓은 채 바라보았다면 <물숨>처럼 한숨과 눈물과 침묵이 더 많은 순간을 차지할 텐데 말이지요.


 

 어떤 대상을 그 자체로 바라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입니다.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지평에 따라 관점과 시선은 굴절될 수 밖에 없으니까요. 중요한 건 그 대상을 ‘특정한 형태로 보고싶다는 욕망’이 은연 중에 개입되지 않는지 경계하는 태도입니다. 나의 보고자 하는 욕망보다 그 대상이 ‘보여지고 말하려 하는 욕망’에 귀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해요. 내가 잘 모르는 대상을 대할 때도, 심지어 내가 잘 알고 있는 (혹은 잘 알고 있다고 맹신하는) 대상에 대해서도요. 여름을 맞이한 예능에서 제주 해녀의 모습을 심심치않게 발견합니다. 연예인들이 물질 체험을 하면서 ‘이 정도면 해녀해도 되겠는데?’, ‘매일 신선한 해산물 먹을 수 있는 해녀가 되고 싶다’라는 말들이 쉽게 쏟아져 나와요. 그 말들은 ‘물숨’을 두려워하는 해녀의 삶과는 너무 멀어 가볍게 웃어넘기기에 아찔한 마음이 드는 요즘입니다. 





*참고

변지철 기자, <제주의 상징 해녀…조선 임금도 잠수 물질 고통 헤아렸다>, 연합뉴스(2016. 12. 1)  

이상호 기자, < [조례를 찾아서](25)사라져가는 ‘제주해녀’, 유네스코 문화유산 등재 발판 된 조례>, 경향신문(202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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