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일: 과거와 이별하는 하나의 사건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 의 태풍

by Limi

오늘 뉴스는 하루종일 태풍 '바비'를 유의주시하고 있네요. 최고의 순간풍속을 기록할 거라던 무시무시한 태풍은 다행히 제주에 큰 피해를 일으키지 않고 북상해, 오늘 밤 서울을 지나간다고 합니다. 귀가 직전에 하늘이 심상치 않더라고요. 오늘 자기 전에 문단속 잘 하시고 부디 폭풍 피해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태풍전야의 시간, 오늘 제가 좋아하는 감독의 영화 한편을 소개해드리고 싶어요. 지난해 <어느 가족>으로 칸 영화제의 '황금종려상'을 받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입니다. 맞아요, <어느 가족>외에도 <아무도 모른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바닷마을 다이어리> 등의 좋은 필모그라피로 잘 알려져 있죠. 저에게 감독은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가족' 개념을 다시 생각하게 해주고 확장될 수 있는 가족의 가능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라고 느껴져요. 오늘 이야기하려는 영화 <태풍이 지나가고>도 마찬가지입니다.



<태풍이 지나가고>의 주인공 료타는 어머니와 누나가 '대기만성형'이 아닌 만년 '대기'만 한다고 놀려대는 대책없는 아들에 가깝습니다. 왕년에 문학상을 수상했던 소설가였지만 지금은 사설탐정 사무소에서 일하며 고객들을 구슬리거나 협박해 사장 몰래 돈을 더 받아내고, 번 돈은 경륜장이나 도박장에서 탕진해버리죠. 능력이 없어 이혼을 했지만 어린 아들 싱고를 무척 아끼고 전아내에게도 미련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한달에 한번 일요일 낮에 아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데, 그날은 공교롭게도 강력한 태풍이 북상한다는 날이었습니다. 그는 아들과 함께 할머니를 보러가 전아내까지 불러 함께 저녁을 먹게 되는데, 결국 태풍에 갇혀 그들은 할머니댁에서 하루밤을 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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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태풍이 지나가고>의 스틸컷들 (출처:네이버영화)



료타가 경제적으로 무능한 가장인 사실과 동시에 중요한 또다른 성향은 과거에 집착한다는 것입니다. 그는 과거 소설가로 누렸던 영광에 머물고 있고 그의 가정이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하지도 않죠. 그런 그에게 주변인들은 뼈있는 조언들을 건넵니다. 그의 누나는 돈을 빌리러온 그에게 아버지 또한 몇년 전 똑같은 자리에서 자신에게 그런 부탁을 했었다며 "비참하지않니, 니가 싫어하건 사람이랑 닮아간다는거?"라고 비난해요. 탐정사무소의 사장은 "누군가의 과거가 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남자는 진정한 어른이 되는거야"라고 충고하고요. 할머니는 아들인 그에게 어째서 남자들은 현재를 살지 못하는지 묻죠. "행복이란건 무언가를 포기하지 않으면 손에 쥐지 못하는 거란다"라고 말하는 그녀의 시선은 지혜로 가득차있습니다.



태풍이 몰아치는 밤, 료타는 잠에서 깨난 싱고를 데리고 아파트단지 내 공원의 미끄럼틀로 갑니다. 문어모양의 미끄럼틀 안에서 비를 비하며 챙겨간 간식을 먹으며 나누는 부자의 대화는 단순한 듯 하면서도 의미심장합니다. 뭐가 되고 싶냐는 질문에 아들이 야구선수가 아닌 공무원이 되고 싶다고 대답하자 료타는 실망합니다. 그때 싱고가 "아빠는 뭐가 되고 싶었어? 되고싶은 사람이 되었어?"하고 묻죠. 료타의 눈은 깊어집니다. 이내 솔직하게 대답하죠. "아빠는 아직 되지 못했어. 하지만 되고 못 되고는 문제가 아냐. 중요한건 그런 마음을 품고 살아갈 수 있느냐이지." 싱고가 주머니에 넣어놨던 복권을 잃어버려 태풍 속에서 가족은 복권을 찾는 작은 소동을 벌이면서 태풍은 지나갑니다.



태풍이 지나가고 눈이 부신 아침이 찾아옵니다. 가족은 할머니가 차려준 아침을 먹고 일찍 집을 나서는데, 그 여정에서 료타가 살짝 변한 모습들이 보입니다. (어떻게 변했는지는 영화를 직접 보며 발견하시길 바래요!) 헤어나오지 못했던 과거의 미련과 습관 속에서 한발자국 떨어져나온 듯 느껴져요. 아마도 그건 이 영화에서 '태풍'이란 사건이 지닌 은유의 기능과도 연결되어 있는 듯 합니다. 할머니가 자신은 태풍이 좋다고 말하는 장면이 나와요. 다음날 세상이 깨끗해지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대죠. 내가 온전히 현재를 살지 못하고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건 과거에 얽매여있기 때문입니다. 그것과 과감히 이별할 수 있을 때, 내 안의 미련의 잔여물들을 깨끗하게 씻어냈을 때, 비로소 료타처럼 한발 전진할 수 있겠죠. 할머니가 강조한 일상의 소중한 사랑과 행복은 거기서부터 가능해질 것입니다.



오늘 태풍의 한가운데서 여러분도 아직 이별하지 못한 과거를 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태풍과 함께 씻겨내리고 싶은 무언가가 있는지. 그러면 내일 아침, 태풍이 지나간 자리에 한층 투명한 햇살이 우리를 비쳐주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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