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일: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허수경 시인의 <레몬>

by Lim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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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시를 동경해요. 시는 포물선을 그리며 멀리 날아가 꽂히는 문장 같아요. 그 아득함과 정확함이 좋아 자주 시를 챙겨읽고요. 오늘 나른한 오후, 좋아하는 허수경 시인의 시집을 펼쳤다가 <레몬>이란 시를 다시 읽게 되었습니다. '여름은 사랑하기 좋은 계절은 아니야'라고 이야기나눴던 방송이 있었는데요. 이 시에는 함께 노래한 적 없는, 앓고 불우했던 너와의 계절을 여름이라 부르는 '나'가 있어요. '나'에게 여름은 현재의 순간들로 충만했지만 미래로 이어가기 위한 용기를 내지 못해 너무 짧게 끝나버린 기억입니다. 방송에서는 시의 일부만 읽어드렸는데, 이곳에서는 시를 온전히 옮겨놓았습니다.


밤이면 가을의 선선한 공기가 느껴지는 요즘. 우리의 여름은 어떻게 익어가고 있는지 이 시를 통해 돌아보았으면 좋겠어요. 여러분의 여름에는 어떤 사랑의 기억이 깃들어 있는지요. 시퍼런 빛들을 부끄럼없이 올려다봤는지, 기대오던 어깨를 안아주지 못한 후회가 있는지, 먼 과거로 띄워야 할 건네지 못한 말들이 남아있는지. 아직 남은 여름의 끝자락에서 이제라도 내야 할 용기는 없는지.








레몬

허수경


당신의 눈 속에 가끔 달이 뜰 때도 있었다 여름은 연인의 집에 들르느라 서두르던 태양처럼 짧았다

당신이 있던 그 봄 가을 겨울, 당신과 나는 한 번도 노래를 한 적이 없다 우리의 계절은 여름이었다



시퍼런 빛들이 무작위로 내 이마를 짓이겼다 그리고 나는 한 번도 당신의 잠을 포옹하지 못했다 다만 더운 김을 뿜으며 비가 지나가고 천둥도 가끔 와서 냇물은 사랑니 나던 청춘처럼 앓았다



가난하고도 즐거워 오랫동안 마음의 파랑 같은 점심 식사를 나누던 빛 속, 누군가 그 점심에 우리의 불우한 미래를 예언했다 우린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우린 그냥 우리의 가슴이에요



불우해도 우리의 식사는 언제나 가득했다 예언은 개나 물어가라지, 우리의 현재는 나비처럼 충분했고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처럼 그리고 곧 사라질 만큼 아름다웠다



레몬이 태양 아래 푸르른 잎 사이에서 익어가던 여름은 아주 짧았다 나는 당신의 연인이 아니다, 생각하던 무참한 때였다, 짧았다, 는 내 진술은 순간의 의심에 불과했다 길어서 우리는 충분히 울었다



마음속을 걸어가던 달이었을까, 구름 속에 마음을 다 내주던 새의 한 철을 보내던 달이었을까, 대답하지 않는 달은 더 빛난다 즐겁다



숨죽인 밤구름 바깥으로 상쾌한 달빛이 나들이를 나온다 그 빛은 당신이 나에게 보내는 휘파람 가다 그때면 춤추던 마을 아가씨들이 얼굴을 멈추고 레몬의 아린 살을 입안에서 굴리며 잠잘 방으로 들어온다



저 여름이 손바닥처럼 구겨지며 몰락해갈 때 아, 당신이 먼 풀의 영혼처럼 보인다 빛의 휘파람이 내 눈썹을 스쳐서 나는 아리다 이제 의심은 아무 소용이 없다 당신의 어깨가 나에게 기대오는 밤이면 당신을 위해서라면 나는 모든 세상을 속일 수 있었다



그러나 새로 온 여름에 다시 생각해보니 나는 수줍어서 그 어깨를 안아준 적이 없었다

후회한다



지난여름 속 당신의 눈, 그 깊은 어느 모서리에서 자란 달에 레몬 냄새가 나서 내 볼은 떨린다, 레몬꽃이 바람 속에 흥얼거리던 멜로디처럼 눈물 같은 흰빛 뒤안에서 작은 레몬 멍울이 열리던 것처럼 내 볼은 떨린다



달이 뜬 당신의 눈 속을 걸어가고 싶을 때마다 검은 눈을 가진 올빼미들이 레몬을 물고 향이 거미줄처럼 엉킨 여름밤 속에서 사랑을 한다 당신 보고 싶다, 라는 아주 짤막한 생애의 편지만을 자연에게 띄우고 싶던 여름이었다


- 허수경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 문학과지성사(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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