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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04. 2020

네 아픔의 이유는 네가 부여해야해

이해할 수 없는 고통으로 괴로워하는 너에게

너에게



 태풍이 휩쓸고간 하늘은 어찌나 높고 청명하던지. 오전 내내 아무 일도 손에 잡히질 않고 나는 커다란 창 앞에서 서성였어. 티없이 맑은 햇빛 때문인지 하릴없이 하늘을 올려다보는 눈이 시리더라. 네게 괜찮냐고 묻기까지도 몇분이 걸렸어. 부드럽고 뭉특한 표현을 찾으려 노력했지만, 물음표를 단 질문은 본질적으로 상대를 찌르기 마련이라고. 내 물음에 움찔거릴 너의 마음을 내가 먼저 견디지 못하겠어서, 나는 최대한 먼 곳을 보려했단다.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라는 말이 있지. 이 말은 종종 위로의 말로 건네어지기도 해. 자신에게 벌어진 일을 인정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말이야. 물론 모든 일에는 원인과 결과가 있지. 그런데 인과관계 속의 원인이 그 일이 왜 ‘네게’ 일어나야 했는지를 온전히 설명 해주진 못해. 그건 별개의 문제인걸. 내게 그러더라. ‘그 일’이 ‘너’에게 일어난 데에는 우리가 ‘아직’ 알지못하는 (세계나 신의) 커다란 의도가 놓여 있다는 말들을. 그럴 때마다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알게 되더라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어서, 그 양극단을 오가며 괴로워했어. 내가 부족한걸까? 그것을 삶의 자연스런 시련으로 받아들이고 고통이 아닌 깨달음으로 내 안에 들이기에. 나는 그 말이 내포한 은근한 암시, 어떡해서든 너에게 일어났을 거라는 당위성이 싫었어. 난 생각해. 우연과 확률의 세계에서 납득할 수 있는 일보다 그러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이 일어나는데. 마치 정당하고 당연한 일마냥 그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 ‘이해하고 받아들여’라고 말하는 것만큼 부조리한 건 없다고 말이야.



 나는 다만 이렇게 믿고 싶어. 이유는 원래 있는게 아니라 부여하는 거라고. 우리가 당한 사고의 이유는 우리보다 앞서 존재하지 않아. 설사 있다하더라도 이해할 수 없고 인정하기 싫다면 그건 우리의 것이 아니야. 이유는 우리가 설정하면 되는 거야. 내가 내가 겪은 일의 주인이어야 해. 네게 해주고 싶은 말은 이거였어. 네가 입은 상처를 다른 사람이 이름 붙이도록 양보하지마. 그건 너만이 느끼는 아픔이자 오롯이 네가 감당하게 될 몫이잖아. 그러니 그 일의 이유도 네가 정하는 거야. 네가 그 일을 겪어야 했던 이유를 스스로에게 말할 수 있게 됐을 때, 이미 너는 절반쯤 극복한 거라고 생각해. 네가 그 일을 네 삶에 어떻게 위치시킬지 알았다는 걸 의미하니까. 고통의 한복판에서 빠져나와 그 일이 과거가 되도록 앞으로 걸어 나가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거니까. 그렇게 되기 전까지 어설픈 위로에 너를 애써 맞추려 하지마. 홀로 답을 내는 일이 외롭고 괴롭겠지. 내가 그 캄캄한 시간을 함께 걸어가줄게. 우리의 시제는 미래로 되맞춰야해. 그 모든 일들을 네 손으로 해낼 수 있게 내가, 우리가 있을게.


너는 할 수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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