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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Oct 30. 2020

이질적인 시간성의 시들

부산시립미술관: 빌 비올라의 <조우Encounter> 전시

나의 작품이 가장 의미 있게 존재하는 장소는 미술관 전시실도, 텔레비전도 그리고 비디오 화면 그 자체도 아니다. 그곳은 바로 작품을 보았던 관객의 마음 안이다.

빌 비올라, 1989. 

 



 작품을 마주하고 있는 것 만으로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던 시간의 계가 위태로워집니다. 찰나의 순간을 길게 늘려 보여줌으로써 그는 균일하다고 믿는 시간의 연성을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그리고 시간의 주름 속에 감추어져 있던 미세하고 미묘한 결들을 목격하게 하죠. 빌 비올라 작품의 1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셈하는 1분의 시간과는 질적으로 다릅니다. 시간은 더 이상 기계적이고 균질한 단위일 수 없습니다. 그의 작품이 우리를 이질적인 시간의 계로 옮겨 놓기 때문입니다.  



 빌 비올라Bill Viola는 미국 뉴욕 출신의 뉴미디어 아티스트입니다. 1951년생인 그는 시라큐스Syracuse 대학에서 뉴미디어와 인지심리학, 음악 등을 전공하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합니다. 그는 인간의 의식과 경험에 관한 주제의식 아래서 탄생과 죽음, 감정, 영적 체험 등 근원적인 문제를 사유합니다. 작가가 동양 철학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의 신비주의, 이슬람교 수피즘 등 여러 종교를 아우르는 인간의 영적인 체험과 초월적인 능력에 대한 관심이 높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습니다. 이로 인해 그의 작품은 사색적이고 엄숙한 특징을 넘어 숭고함까지 느끼게 하지요. 



 <이우환과 그 친구들> 시리즈의 두번째 전시로 개최된 빌 비올라의 <조우>전을 보면서 저는 그가 시인처럼 느꼈습니다. 영상작품의 전시를 보기 보다 연작 시를 ‘보고’ 있다고요. 그건 언어를 재료로 삼은 시를 ‘읽는’ 것과는 다른 시의 독해였습니다. 시를 받아들이고 느끼고 소화하는 감각이 달라지니까요.. ‘시’를 장르적으로 정의하는 일은 단순치 않고 숱한 논쟁을 부르겠죠. 적어도 제가 그의 작품세계를 시로 규정할 때의 ‘시’는 인과적이고 서사구조를 가지지 않은 채, 매체의 한계를 극대화하며 표현하지 못한 더 큰 의미로 가 닿게 하는 시도라는 문맥에 있습니다. 빌 비올라를 시인으로, 그의 작품들을 시로 여기게 만들었던 것은 그가 작품에서 시간의 법칙을 이용하는 동시에 위반하면서 창조해낸 다른 ‘시간성’ 때문이에요.




<아니마>를 처음 보았을 때 사진인 줄 알았다. 극도로 늘려놓은 시간은 인물을 정지상태로 고정된 대상처럼 느끼게 하는데, 미세한 표정과 감정의 변화가 흐르고 있다. 
기이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게 했던 <관찰>(좌)과 <놀라움의 5중주>



 1분 동안 기쁨, 슬픔, 분노 두려움의 네 가지 감정을 표현한 인물의 표정을 81분의 시간으로 늘려놓은 <아니마>(Anima, 2000). 두 여인이 우연히 한 여인을 만나는 45초의 순간을 10분에 걸쳐 보여주는 <인사>(The Greeting, 1995). 프레임 바깥의 무엇을 보며 충격과 슬픔을 느끼는 군상의 표정과 행동을 느리게 보여주는 <관찰>(Observance, 2002). 다섯 명의 배우가 놀라움을 표현하는 짧은 순간을 10분 길이의 슬로모션으로 보여주는 <놀라움의 5중주>(The Quintet of the Astonished, 2000)까지. 질적으로 다른 ‘시간성’을 목도함으로써 그는 관객이 시간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유하고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듯 합니다. 1초, 1분, 1시간… 우리의 삶을 지배하는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과 다른, 주관적이고 비균질적인 시간 말이예요. 



 생각해보면 우리에게도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 몰랐다’, ‘그 짧은 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등의 관용적인 표현이 있습니다. 일상에서도 종종 일반적인 시간 관념을 빗겨나는 체험을 한다는 걸 의미하겠죠. 하이데거는 『존재와 시간』에서 ‘시간성’을 현존재의 근원적인 지평으로 삼습니다. 실존하는 존재의 의미는 시간성에 의거해 획득된다는 것인데요, 여기서 시간은 과거-현재-미래로 분절되고 선형적으로 흐르는 형태가 아닙니다. 이때의 시간은 엄밀하게 구분될 수 없는 통합적인 것이고, 언제나 도래할 미래를 안은 구조를 띠게 됩니다. 어렵지만 (저의 이해도 불완전한 것임을 고백합니다) 중요한 것은 존재와 세계의 의미는 자기 내재적인 이해를 통해서 가능하다는 논지입니다. 시간적 질서 안에 놓인 우리가 아니라 우리 안에서 새롭게 구조화되는 시간성의 문제가 실존의 차원에서 중요해진다는 의미죠. 



  빌 비올라의 전시에 제가 한참을 머무를 수 있던 이유는 그의 시들이 일상적인 시간의 감각을 탈각시켰기 때문이었을 거예요. 위의 언급한 작품 외에도 인식과 환영에 대한 재기발랄한 초기 작품들(<투영하는 연못>, <엘제리드호> 등)과 신성함과 숭고함에 침잠하게 하는 일련의 작품들(<밀레니엄의 다섯 천사>, <밤의 기도>, <순교자들> 등)이 있습니다. 이 작품이 내포한 다른 특징과 감동에 대해서도 언젠간 쓸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빌 비올라는 작품을 통해 주장하거나 설득하지 않고, 가르치려 들지도 않습니다. 다만 작품의 표면으로 보여줌으로써 다른 차원의 의미로 우리를 초대하죠. 하지만 그 의미들은 미리 작품에 내재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가 말한 것처럼 작품을 바라보는 개개인의 관객의 마음에서 완성되는 것이지요. 이 열린-의미의 세계를 개시하기 위해 시간성은 교란되었고, 그는 시인이 될 수 밖에 없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전시기간: 2020-10-21~2021-04-04

전시장소: 부산시립미술관 3층 대전시실, 이우환공간 1층 제 3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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