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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Oct 20. 2020

집 없는 이는 이웃도 없어라

정주하지 못하는 불안정한 삶 속에서

 

괴롭고 스산한. 그러나 보잘 것 없는 웃음들로 그 무게가 견딜만 해지던. 끝내 눈이 퉁퉁 붓게 울렸지만 동시에 소박한 낙관과 희망을 품게 했던 '나의 아저씨'.  



 지인들의 전폭적인 추천으로 며칠 전 16부작의 <나의 아저씨>를 완주했습니다. 2018년에 방영한 이 드라마는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그해 백상예술대상에서 작품상과 극본상을 수상하며 작품성을 입증 받았습니다. 어제는 작가 파울로 코엘료까지 넷플릭스로 본 이 드라마를 인간 심리를 섬세하게 묘사해낸 수작이라고 칭찬 트윗을 날려 다시 한 번 화제가 되고 있죠. 이 드라마에 대해 할 수 있는 이야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참 많지만 나중으로 미뤄두고, 오늘은 이 드라마의 공간적 배경이었던 동네 ‘후계동’을 소환하고 싶네요. 이 마을은 서사에서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보는 내내 저는 갖고 있지 못한 ‘동네’와 ‘이웃’의 온기를 꿈꿀 수 밖에 없었죠.   



 주인공 동훈(이선균 역)이 태어나 초중고를 나오고, 결혼을 해서도 살고 있는 후계동. 그의 가족(어머니와 골칫덩어리 삼형제)은 물론 학창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이 살고있습니다. 매일 저녁 출석을 하지 않으면 서운한 단골 가게 ‘정희네’가 있고, 주말마다 공을 차는 조기축구회의 관계는 얼마나 돈독한지요. 동네 후미진 골목마다 친구 또는 선후배의 집이 있고 그들은 서로의 삶을 제 삶처럼 여깁니다. 커다란 영광도 남부러울 행복도 없는 인생이지만 함께 부대껴 늙어가기에 유쾌하고 또 든든한 이웃들. 동훈의 아내는 그들의 관계가 지긋지긋하다고 하지만, 지안(아이유 역)은 다음 생에 이 동네에서 태어나고 싶다고 말합니다. 외롭게 살아가는 이에게 후계동만큼 순박한 온정이 넘치는 공간은 또 없으니까요.  




후계동 외진 곳에 사는 지안을 위해 마을 사람들 다같이 바래다주는 장면은 마음 저 편까지 따뜻하게 해주는 장면이였어요.


 자연스럽게 저는 제가 살고 있는 동네를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어요. 이사온 지 2년이 넘어가는 아파트 단지는 내천과 한강이 가깝고 단지내 산책로가 참 예뻐요. 대중교통을 이용하기 쉽고 전통시장과 마트들도 가까워 일상을 꾸리는데 편리합니다. 계속 이 동네에 살고 싶냐는 물음에 저는 언제나 고개를 끄덕여요. 하지만 제게는 이웃이 없습니다. 우리 동 168세대 중 제가 얼굴과 이름을 알고 있는 호수는 한 곳도 없어요. 엘리베이터나 복도에서 건네는 인사에는 다들 부담스러운 눈치고, 그나마 두 아들의 등원시간에 자주 마주치면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옆집마저 이사를 가면서 이 커다란 단지 내 제 삶이 섬처럼 존재한다고 느껴집니다. 외따로 고립된 호수 하나.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 이웃이 되는 일은 그들 사이에 지난한 시간과 교류를 요구해요. 그래서 주거가 불안정해 여기저기로 옮겨 다니는 삶에서는 이웃을 갖기가 너무나 어렵습니다. 고향인 제주에서 제게 동네는 곧 이웃이었어요. 고향인 서귀포에서는 돌담과 대문이 무색하리만큼 이웃집을 드나들었고, 제주시 아파트에서도 같은 라인 집들의 대소사 정도는 알고 있었거든요. 그러나 서울에 상경 이후 살았던 연희동-동교동-합정동의 원룸들, 그리고 지금의 아파트까지, 우편물 겉봉의 이름을 힐끔하지 않으면 옆집에 누가 사는지 끝내 알 수 없는 곳들이었습니다. 전월세 형태로 기거할 때 제가 맺는 관계라고는 계약서를 사이에 둔 집주인과 세입자라는 관계뿐이었죠(안좋은 일로만 연락을 하게 되는). 결국 넓은 땅덩어리에 내 집 한 채 가지지 못한 이들에게는 이웃이란 존재도 사치스런 환상인 걸까요. 한곳에 정주할 수 없는 이에게는 이웃을 지긋지긋해 할 자격도 주어지지 않나 봅니다. 



 아파트 1층 현관에 놓인 의자에 종종 나와 앉아 계시는 할머니 한 분이 계세요. 혼자 살고 계시는 할머니는 그곳을 오가는 아무에게나 말을 건넵니다. 그러나 분명한 질문의 형태도 아니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려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냥 지나치더라고요. 가령 ‘무슨 요일인지 도통 모르겠네’, ‘지금 나가면 은행이 열었을랑가, 헛걸음하면 안될 텐데’ 식의 말들이요. 저는 우연히 마주칠 때마다 할머니의 우회적인 질문에 꼭 대답을 해왔어요. 어떤 날은 제게 통장을 보여주면서 입금 내역을 확인해달라고 부탁하시기까지 했죠. 사소한 궁금증부터 사적인 일들까지 아무나 붙잡고 물어야 할 만큼 이웃 없이 사는 어떤 이의 삶은 절박해지기까지 합니다. 코로나19로 마스크 뒤에서 서로를 경계하며 살아가야 하는 요즘. 먼 곳의 가족과 친구들과는 좀처럼 만나질 못하며 홀로 사는 이들의 고독은 커져만 가는데. 가장 가까이서 살아가는 타인들과는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을까요. 정겨운 이웃을 꿈꾸는 외로운 사람들의 마음을, 충분히 행복하고 풍요로운 이들은 아마 이해하지 못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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