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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25. 2020

비움과 동시에 채우는, 명상

피크닉의 <명상Mindfulness> 전을 다녀왔습니다  

 하루에도 몇십개의 안전경보를 받아야 하는 날들이 계속되면서 핸드폰은 진작에 무음 모드로 바꿔놓았습니다. 그러나 알림음이 울리지 않는다고 해서 의식도 off가 된 건 아니예요. 교수님이나 가족의 급한 연락이 오진 않았는지, 기다리는 메일의 답장이 왔는지 계속 확인하고 있으니까요. 또 세상에는 속보와 특보가 왜이리 많은지. 타인과 세계, 나를 나의 외부와 연결해주는 이음새에 신경을 곤두세우다 보니 자연스레 나의 내면을 돌아보는 일과는 멀어집니다. 숨가쁜 일상에 껍데기의 나만 여기저기 산재할 뿐, 그 안의 알맹이는 텅 빈 듯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오늘 <명상(Mindfulness)> 전시의 입장을 기다리며 핸드폰을 끄고 깊은 호흡을 하면서 알아차렸습니다. 내가 온전히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을 허락하는게 참 오랜만이라는 사실을요. 



명상의 간결하고 정돈된 안내 팜플렛!



 피크닉에서 사전예약제로 제한된 인원이 관람할 수 있는 <명상>전은 체험형 전시입니다. 무위(無爲)의 시간이 사라진 오늘날, 행위의 가속을 잠시 멈출 수 있도록 기획했다는 전시. 전시장 내에서 모든 촬영은 금지되고 관람객 간의 대화도 자제되는 전시는 명상을 실천하고 행위화하는 아티스트의 작품들과 관객들을 명상의 체험으로 이끄는 체험 공간과 프로그램이 같이 놓여있습니다. <죽음과 함께하는 삶 Being with Dying>에서는 차웨이 차이Charwai Tsai의 영상작품과 미야지마 타츠오Miyajima Tatsuo의 설치작품이 죽음을 삶 속으로 소환해내며 가능한 깨달음을 보여줍니다. <수행 Practice>에서는 예술을 자기수행으로 승화시킨 박서보의 그림과 자오싱 아서 라우의 영상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들은 극한에 다다르는 행위로 자신을 밀어내 성찰적인 명상이 가능해진다는 걸 보여주는 예술가들이죠. <알아차린다는 것 Awarness>에서는 명상에서의 자각이 특히 몸의 감각을 인지하는 것과 깊이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깨닫게 합니다.  




 오마 스페이스의 ‘느리게 걷기 Slow Walk’는 관객이 ‘의식의 길’을 천천히 걸음으로써 감각과 의식에 집중하도록 고안된 체험입니다. 관객은 헤드셋을 통해 들리는 느린 템포의 사운드에 맞춰 맨발로 나선형의 좁은 미로를 걷게 됩니다. 맨 처음 굵은 자갈을 밟을 때는 둔탁한 통증을 느꼈어요. 맨 발바닥으로 거친 지면을 걷는 일은 실로 오랜만이었거든요. 발 끝의 생경한 촉각과 통각에 집중하면서 자갈돌에서 작은 조약돌로, 굵은 모래에서 입자 고운 흙, 그리곤 부드러운 융단 위를 걸었습니다. 감각에 민감해지다 보니 부산스러운 생각은 잦아들고 오직 걷고 있는 나만이 남아있게 되더라고요. 미로 중앙에는 작은 샘 하나가 있었는데, 그 잠잠한 수면에 저의 얼굴을 비춰보게 되었습니다. 이 체험의 영감이 되었다는, 탑 주변을 느리게 도는 승려들의 원형행진을 떠올리며, 명상이라는 수행은 어쩌면 존재는 하지만 닿을 수는 없는 세계와 나의 본질을 조금이나마 알기 위해 그 주위를 맴도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게 됐죠.




 플라스티크 판타스티크와 마르코 바로티가 협업하여 인간의 폐를 공간화한 ‘숨쉬는 공간’을 통과하고, 데이빗 린치의 ‘막이 오르다’ 영상을 보고 나면 거대한 <의식의 바다 Sea of Consciousness>와 만납니다. 패브리커의 ‘공간’도 안내자의 도움으로 체험하는 전시의 마지막 작품이예요. 포그가 가득한 공간은 끝의 경계가 뿌옇게 가려져 마치 무한의 공간처럼 느껴졌습니다. 노랗고 주황빛의 조명은 은근한 온기를 지니고 있었고요. 더 깊은 의식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는 통로이고자 하는 공간은 기획자의 나레이션 후 짧게 암전합니다. 눈을 떠도 감은 것처럼 일말의 빛도 남아있지 않은 완벽한 어둠 속에서 저도 그 순간만큼은 의식적인 생각을 멈추었던 것 같아요. ‘공간’의 시공처럼 제 안도 그러길 바랬습니다. 비울수록 채울 수 있고 멈출수록 가장 활발할 수 있는. 표현할 수 없지만 가장 많은 것을 의미하는. 





 전시를 관람하고 나면 피크닉의 옥상정원에서 차 한잔을 마실 수 있습니다. 어둡고 고요한 전시장에서 청명한 하늘 아래로 나오니 세신洗身을 한 것 같은 개운함이 있었어요. 전시를 봤던 그날은 유독 날이 화창해서 더 그렇게 느꼈는지 모르겠네요. 차를 내어주는 곳에서는 6가지 증상 중에서 자신의 상태와 가장 가까운 상태를 선택하게 돼요. 


가끔 무기력해진다 / 화나는 일이 많다 / 결정을 잘 못 내린다 / 머릿속이 복잡하다 / 이유 없이 불안하다 / 성격이 급한 편이다 


 쓸데없는 생각과 고민을 끌어안길 좋아하는 저는 ‘머릿속이 복잡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So clear’라는 쓰인 처방을 받았아요. 툇마루 한쪽에 앉아 솔잎향이 입안에 퍼지는 차를 천천히 들이켰습니다. 전시를 보고 체험한 두시간 남짓한 시간 동안 그간 나를 제자리에 정체 시켰던 문턱 몇 개를 넘었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건 명료한 빛만을 보게 하는 어둠 덕분이기도 했고, 그 어둠 속에 천천히 흐르는 차분한 향과 사운드가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죠. 전시 작품들이 가진 목소리처럼 나 또한 나에게 낮고 신중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야겠다고 마음 먹게 됐습니다. 종교적이거나 전문적인 명상까지 나아가지 않더라도 나를 돌아보는 ‘정지’의 시간을 갖는 데는 후해져야겠죠. 전시관을 나오는 길에 마음이 편안해지는 향의 인센스 스틱을 사고, 자갈 위를 걸었던 걸음걸이를 생각하며 걸었습니다. 그거 아세요? 명상의 효과 덕분인지 핸드폰을 꺼놓았다는 사실을 한참 지난 후에야 알아차렸다는 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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