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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26. 2021

나를 단단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사랑

청춘의 미숙과 혼란을 통과해나가는 사랑 이야기 <노멀 피플>

 대학원생은 학기와 방학, 수업과 비수업의 구분 없이 늘 공부하는 존재라고 하지만, 방학은 방학입니다. 시간을 조직하는 형태가 달라지거든요. 방학에도 읽어야할 전공도서가 산더미고 학회 발표나 학술지 투고를 위해 원고를 부지런히 써야하지만. 적어도 매주 빡빡하게 완수해야하는 수업 과제에서는 자유롭기때문에 여가 시간을 내기가 훨-씬 쉽거든요. 저에게는 방학 첫달은 그간 미뤄왔던 영화와 책, 전시와 공연을 폭식하는 시간이랍니다. 특히 호흡이 긴 드라마를 완주하는 일은 마음의 여유가 있는 이런 때 아니면 정말 어려워요. 그래서 이번에도 겨울 방학이 되자마자 시작한 드라마가 있었는데, 바로 2020년 BBC에서 방영된 <노멀 피플Normal People>입니다. 


드라마에서는 메리앤은 자신을 못생기고 매력없는 여자라고 생각하는 자존감 낮은 인물인데 그 설정에 공감이 안될만큼 예쁘다 (사진출처:IMDB)


 럭비 선수로 활동하는 인기남 코넬과 똑똑하지만 까칠하고 반항적인 메리앤은 학교 바깥에서 종종 얼굴을 마주합니다. 코넬의 어머니가 메리앤 집의 도우미로 일하시기 때문이죠. 가난하지만 사랑이 넘치는 코넬의 편부모 가정에 비해, 경제적으로 부유하지만 가족간의 유대관계가 약한 메리앤은 학교에도 친구한명 없습니다. 그래서 가끔 어머니를 데리러 오는 코넬이 메리앤의 유일한 대화상대죠. 두 인물은 상이한 환경 속에서 각기 다른 결핍을 지녔습니다. 어쩌면 그것이 서로에게 끌리게 만든 이유인지도 모르겠어요. 그들은 사랑을 시작합니다. 남들의 눈에 띄지 않게, 비밀스럽게. 



 둘의 사랑을 공개하지 않는데는 각자의 사정이 있었는데, 결국 그들은 그때문에 상처를 주고 받으며 끝나게 돼요. 대학생이 되어 트리니티 대학에서 우연히 조우하게 된 둘. 새로운 환경에 적응한 코넬과 메리앤은 고등학생 시절과는 많이 달라졌지만, 둘 사이에 제대로 매듭짓지 않은 감정은 여전합니다. 조심스럽게 친구가 되었다가 사랑이 타오르고. 다시 이별하지만 여전히 곁에 머무는… 그들의 관계는 그들이 통과하는 청춘의 시기처럼 불확실하고 충동적이고 위태롭지만, 그만큼 강렬하고 투명합니다. 공부와 취업, 친구들과 가족의 문제. 아직 어린 둘은 시행착오를 통해 인생을 배워갈 수 밖에 없고, 회피하고 좌절하고 고통받다 다시 도전하는 삶의 코너 코너마다 코넬과 메리앤은 엇갈리듯 다시 만나며 서로에게 힘이 됩니다. 



 혹자는 코넬과 메리앤의 사랑을 뻔하디 뻔한 로맨스라고 단정할 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지만 제게는 그 이상처럼 느껴졌어요. 코넬과 메리앤이 사랑하는 시간은 자기 자신의 가장 나약한 면모, 고약한 결점을 발견하는 과정과 겹쳐져 있거든요. 자신의 문제를 인정하고 해결하거나, 타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을 수 있는 용기를 내는 일이기도 했고요. 그건 사랑의 차원을 넘어 인간적으로 성숙해지는 계기와 같았습니다. 인생의 가장 혼란스럽고 어두운 시기를 함께 통과한 사람은 친구나 연인이라는 단순한 관계의 이름만으로 충분히 설명되지 못하는 것 같아요. 둘은 더 단단한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고, 고통과 슬픔을 공유하는 두 사람만의 언어가 있죠. 어떤 상처는 단 한사람에게만 고백될 수 있고 그 사람에서만 위로받을 수 있습니다. 삶에서 다른 누구로도 대체불가능한 존재. 제게는 코넬과 메리앤이 그렇게 느껴졌습니다. 



드라마는 아이슬란드가 배경이예요. 바다와 가까운 슬라이고의 아름다운 풍경과 대학이 있는 더블린 도시의 이미지도 극 분위기에 한몫 단단히 하는듯! (사진출처:IMDB)


 드라마는 두 인물의 감정선을 섬세하게 잘 드러내줘요. 코넬과 메리앤이 내면에 간직한 어둠은 굉장히 딥해요. 그런 어둠 뿐만 아니라 첫 경험의 떨림, 재회의 복잡한 심경, 망설이고 단념하는 미묘한 순간들을 잘 포착하고 보는 내내 몰입하게 만들더라고요. <노멀 피플>은 연기, 연출, 음악, 어느 하나 빠지지 않습니다. 아마도 샐리 루니의 원작 소설 <노멀 피플>이 가진 힘 때문이 아닐까도 생각해요. (2018년 맨부커상 후보작이엇던 소설. 곧 읽어볼 생각에 두근두근!) 총 8회로 그리 길지 않지만, 한번 보고 나면 여운은 오래 갈 거예요. 저도 그래서 한번 더 돌려봤거든요. 수많은 장면들이 아름답지만 아무래도 제게는 엔딩이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습니다. (드라마를 보게 될 분들을 위해 스포는 하지 않겠지만) 결국 둘의 진실한 사랑이 서로를 강하고 용기있는 존재로 성장시켰다는 사실을 보여주며 끝나거든요. 


 <노멀 피플>을 보면서 제가 참 좋아하는, 신형철 평론가의 사랑의 정의를 자주 생각했어요. 자신의 결핍과 유약함을 드러내고 그 폐허로부터 시작했던 코넬과 메리언. 그래서 그들의 사랑이 제게는 정말 용감한 사랑이라고 느껴졌기 때문에. 그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제 추천사를 마칠게요.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한 것은 욕망의 세계다. 거기에서 우리는 너의 ‘있음’으로 나의 ‘없음’을 채울 수 있을 거라 믿고 격렬해 지지만, 너의 ‘있음’이 마침내 없어지면 나는 이제는 다른 곳을 향해 떠나야 한다고 느낄 것이다. 

반면, 우리가 무엇을 갖고 있지 않은지가 중요한것이 사랑의 세계다. 나의 ‘없음’과 너의 ‘없음’이 서로를 알아볼 때, 우리 사이에는 격렬하지 않지만 무언가 고요하고 단호한 일이 일어난다. 함께 있을 때만 견뎌지는 결여가 있는데, 없음은 더이상 없어질 수 없으므로, 나는 너를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다.

                                                                                             -신형철 <나의 없음을 당신에게 줄게요> 중에서 





*<노멀 피플>은 WAVVE에서 볼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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