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Jan 30. 2021

이타미 준, 따뜻한 건축가의 마음

수풍석 박물관, 제주의 가장 아름다운 건축을 남기다

이타미 준의 제주 풍(風) 박물관 드로잉. (출처: <이타미 준의 바다> 스틸컷)
 실체화될 그 어렴풋한, 손으로 더듬은 입체의 윤곽과 연속, 그것들을 끌어안는 그 순간 건축물의 스케치를 넘어 새로운 표현의 각성, 심오한 영혼과 같은 어떤 대상과 맞닥뜨리게 된다. 그 대상이 뚜렷이 드러날 때 그것을 건축을 위한 드로잉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나의 건축 작업에서 글과 드로잉은, 솜씨는 서툴어도 사람 냄새가 나고 따뜻한 피가 흐르는 건축을 되돌아보기 위한 훈련의 선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모두 살아가기 위한 것이고 심장이 뛰는 것과 같은 것이다.  

            - 이타미 준, 유이화(엮음), 이희라 옮김, <손의 흔적: 돌과 바람의 조형>(2014) 중에서 참 좋아하는 구절. 


 


 제주가 고향이라는 이유로, 제주로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제게 추천해줄 만한 여행지를 많이 물어요. 부모님댁을 자주 오가는 편이긴 하지만 제주를 ‘여행’으로 체험한 경험은 되려 적어서, 사실 제 추천리스트는 그리 많지 않아요. 오히려 제가 여행을 다녀온 사람들에게 열심히 정보를 얻는 편이랍니다. 그럼에도 꼭 추천하는 곳이 있다면 바로 수풍석 박물관입니다. 서귀포 안덕면 핀크스 리조트 안에 있는 이 박물관은 이곳의 포도호텔을 건축한 이타미 준의 작품입니다. 박물관 또는 뮤지엄이라 불려서 흔히 오해를 하지만, 이 곳은 전시가 이루어지는 공간이 아닙니다. 건축 자체가 작품으로 존재하지요. ‘명상의 공간으로서의 뮤지엄’으로 구현하고 싶었다는 이타미 준의 소망을, 공간에 들어선 순간 어떤 의미인지 단번에 알아차릴 거예요. 



 지금까지 경이롭다고 느꼈던 건축은 많았지만 수풍석 박물관에서 느낀 아름다움은 다른 결이었습니다. 웅장한 규모나 세밀한 세공, 화려한 장식 등에 의해 건축에 압도되었다면, 이타미 준의 건축에서는 다정함이 있었어요. 건축 고유의 언어로가 아니라 자연의 언어로 말을 거는 느낌이랄까요. 이타미 준은 하나의 공간을 주변의 환경, 특히 자연적인 요소들과의 조화 속에서 창조해내려고 했습니다. 본래의 풍경에서 자신의 존재성을 부각시키며 돌출되는 건축이 아니라 풍경을 거스르지 않고 껴안으며 공존하는 건축을 지향했지요. 수풍석 박물관은 그러한 건축적 태도의 정수를 보여주는 듯 합니다. 물, 바람, 돌- 제주의 대표적인 자연 요소를 건축으로 물성화하면서 동시에 공감각적으로 구현해놓았으니까요. 




수풍석 박물관의 모습모습들. 함께 건축된 두손 미술관은 꽤 오래동안 개방되지 않고 있어 무척 아쉽다. (출처: 이타미 준의 바다 스틸컷)



 바다를 향해있는 둔덕의 석(石) 박물관은 무심히 놓여진 돌덩어리 같습니다. 동그란 창을 통해 햇빛이 어둠 한가운데 오롯이 들어앉으면 그곳의 고요는 결코 쓸쓸해지지 않습니다. 언제나 다른 사물의 움직임으로 기척을 느껴왔던 바람이 풍(風) 박물관에서는 형태로, 소리로, 더 분명히 존재했습니다. 통과해가도록 놓아두었기 때문에 바람은 거기에 계속 머물 수 있었고 감지될 수 있었죠. 수(水) 박물관의 물은 자연의 모든 것과 공명하고 있습니다. 해와 바람과 하늘의 움직임을 고스란히 담아내며 자신의 표면에서 새로운 공간을 다시 생성해내고 있죠. 수풍석 박물관에서는 몸의 감각을 열고 마음을 펼쳐내게 되었습니다. 애써 분석하지 않아도 공간의 느낌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것만으로, 건축가로서의 이타미 준의 꿈을 이해하는데 충분했습니다. 


외벽의 완만한 곡선으로 바람이 부드럽게 흐르도록 한다니. 얼마나 아름다운 말이고 마음인지. – 사랑하는 것을 애써 붙잡아놓으려 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것이 그 모습 그대로 자신을 통과해가도록 공간을 창조했다. 동경하는 마음이 담길 수 있도록 기꺼이 스스로를 비우는 고운 마음, 그 겸손한 사랑.

                                                                      -2020년 1월, 바람의 박물관을 방문하고 남겼던 기록.  



 이타미 준의 건축과 생애를 다룬 다큐멘터리 <이타미 준의 바다>(2019)가 있습니다. 이타미 준은 줄곧 현대건축에서 회복해야 하는 것으로 ‘야성성’과 ‘온기’를 꼽아왔습니다. 야성성은 건축의 관념적 형태보다 건축 재료의 물성을 중시하는데 있습니다. ‘그 지역의 돌과 흙으로 지역의 특성과 풍토에서 싹튼 전통 방식으로’ 건축을 짓는 방식은 근대의 건축의 원칙을 극복하는 새로운 시도이죠. 자연과 로컬리티에 대치하거나 지배하려 하지 않고 그것에 뿌리를 두는 야성으로의 희구는 자연히 인간적인 것, 자연적인 것으로부터의 온기를 되찾게 합니다. 이타미 준은 공간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에 의해 완성된다고 믿었고, 그래서 ‘시간의 맛’이 깃들수록 좋은 건축이라고 믿었구요. 


 

 최근 이 다큐를 보고, 또 그의 글을 모은 <손의 흔적: 돌과 바람의 조형>(2014) 책을 읽으면서 당시에는 어렴풋한 느낌으로 남겨두었던 이타미 준의 건축을 조금 더 선명하게 알게 된 것 같아요. 조만간 수풍석 박물관을 다시 가야겠다는 마음을 먹게 됐습니다. 제주의 오름처럼, 어느 소담한 시골 마을처럼 살아숨쉬는 건축인 포도호텔과 가장 낮게 엎드려 있음에도 참으로 경건한 마음을 이끌어내는 방주교회도 가야지요. 더 욕심을 내어 언젠간 온양민속박물관도, 일본의 석채의 교회, 여백의 집, 먹의 집도 갈 수 있다면 좋겠어요. 느껴보고 싶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시간에 의해 익어가는 그의 건축들을요. 그 안의 겸손하면서도 강인하고, 따듯한 건축가의 마음을요.  


 




수풍석 뮤지엄은 하루에 두번 가이드와의 관람만이 허용되며, 한 타임당 25명으로 제한됩니다. 예약이 치열하니 사전에 예약을 서두르셔요. (제 주변에는 예약 가능한 날에 맞춰 제주 여행을 잡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예약은 최대 3개월 까지 가능하거든요) 


매거진의 이전글 나를 단단한 존재로 성장시키는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