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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Feb 15. 2021

이슬람, 여성, 작가- 쉬린 네샤트

비디오 아트 <투바>(Tooba, 2002)>

 커다란 나무에 여성이 깃들어 있다. 아니, 나무는 여성이다. 코란에 단 한번, 이슬람 낙원의 신성함의 은유로 등장했다고 하는 ‘투바’(Tooba, Ṭūbā)*, 드넓은 초원 어딘가 자리잡고 있는 나무. 여성의 감긴 눈꺼풀 위로, 피부의 잔주름 사이사이에는 오랜 침묵이 켜켜이 쌓여 있는 듯 하다. 여성은 그리고 나무는 고요와 평온 속에 뿌리 내리고 있다. 그러나 세속의 세계는 긴박하다. 코란의 기도문을 외우는 목소리 위로 검은 무리들이 헤치고 모이기를 반복한다. 이들은 무언가를 절박하게 찾는 듯 초원 구석구석을 샅샅이 헤집는데, 투바에 가까워질수록 긴장감은 고조된다. 사방에서 포위망을 좁히며 투바로 좁혀오는 사람들. 그러나 이들에게서 이상을 좇는 경건함과 신실함은 느껴지지 않는다. 전투적이고 탐욕스러워 보인다. 사람들이 투바를 둘러싼 담을 넘어 마침내 평화의 지대를 점령하면, 나무의 여성은 사라지고 없다. 나무는 더이상 여성이 아니고, 투바도 아니다.


한네프켄재단+SeMA 미디어소장전 <<파도가 지나간 자리>>를 통해 볼 수 있던 <투바>


 2채널 작품인 <투바>의 대비는 강렬하다. 투바의 이상과 욕망의 세속, 고요와 소란, 정박과 혼란. 두 화면의 분위기도, 리듬도, 소음도, 전환도 다르다. 다른 두 개의 세계가 하나의 서사 안으로 수렴하며 둘은 충돌하고 방해한다. 관객은 그 사이에 존재한다. 무엇을 바라볼지, 그리하여 어떤 장면으로 서사를 구성할 지는 전적으로 관객에게 달려 있다. 두 채널의 대비에서 비롯되는 긴장과는 또 다른 팽팽한 긴장이 현장에 놓이게 된다. 이쪽과 저쪽의 화면을 오가는 시선의 이동도 하나의 리듬으로 서사에 편입한다. <투바>의 리듬이 결말을 향한 단순한 상승곡선을 띠는 건 아니다. 돌진하다 헤매기도 하고 탈주하다 망설이기도 하는 울퉁불퉁함이 되려 시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비균질적인 리듬에는 개개인의 관객을 연루 시키는 힘이 있다. 작가인 쉬린 네샤트의 선언은 이 리듬과 함께 도전적으로 읽힌다. 이슬람의 신성함이 현현된 투바는 여성이다. 여성의 신체는 땅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뻗어가는 나무와 하나이다. 여성의 몸은 자연이다.   



 쉬린 네샤트 Shirin Neshat는 이란 출신의 여성 작가다. 그녀가 미국에서 공부할 당시 이란은 이슬람 혁명(1979)으로 홀라 후메이니(Ayatollah Ruhollah Khomeini)가 집권하면서 원리주의로 회귀한다. 이슬람 율법의 엄격한 적용은 이란 사회의 자유와 평등을 억압했으며 서방세계와의 갈등도 피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가 고국에 돌아가지 못하고 망명자의 삶을 살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망명의 상태는 ‘이란’의 ‘여성’ ‘예술가’인 그녀에게 큰 영향을 끼친다. 그녀의 다층적인 정체성은 거대한 사회정치체제와 분리되어 규정될 수 없기 때문에 그녀는 그녀가 정치적일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TED talk)* 이란과 미국, 그 어디에도 소속될 수 없는 경계인으로 그녀는 근본적인 외로움과 불안을 감내해야 하지만 동시에 두 나라, 두 역사, 두 종교, 두 문화를 비판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어디에도 종속되지 않는 작가의 목소리를 낼 수 있게 했다.


Rebellious Silence & Faceless, from Women of Allah series (1994) via The Collector
Speechless, from the Women of Allah series by Shirin Neshat, 1996, via The Collector



 이란 출신이지만 이란 외부에 있었기 때문에 쉬린 네샤트의 예술은 가능했다. 그녀가 이란의 종교와 정치를 비판하는데 있어 ‘여성’은 가장 중요한 존재이다. 그녀는 한 국가의 여성의 역사를 연구함으로써 그 나라의 이데올로기와 구조를 알 수 있다고 본다. 이슬람 혁명이 여성을 정치적 상징으로 활용하면서 동시에 억압의 핵심 대상으로 저당 잡았듯이, 여성의 존재 위로는 국가와 종교, 정치와 문화의 교묘한 촉수들이 복잡하게 교차한다. 그녀의 초기작 <알라의 여인들>(Women of Allah, 1993–97) 연작들은 담론이 기입되는 장으로써의 여성의 몸을 생각하게 한다. 차도르를 둘러쓰고 내보이지 말아야 할 금기의 신체에는 텍스트가 빼곡하게 적혀 있다. 그러나 여성들의 강렬한 시선, 때로 그들이 우리를 향해 겨누고 있는 총구는 단순히 쓰여진 몸으로 느껴지지 않게 한다. 여성의 피부 위에 장식처럼 혹은 족쇄처럼 수놓아진 페르시안어는 이란 여성 시인들의 싯구이다.* 텍스트는 쓰여진 것이기 때문에 언제든 다시 쓰여질 수 있고,* 여성의 몸들이 받아들이는 기호와 의미는 신체성을 초과하지 못한다. 침묵이 강요된 이슬람 여성들은 허락된 언어를 찾아 눈으로, 몸으로, 도구로 목소리를 낸다.  




<격동> 스크린샷 일부




 언어가 허락되지 못한 여성의 처지는 <격동>(Turbulent, 1998)*에서도 나타난다. 군중의 환호를 받으며 노래를 하는 남자 가수와 달리 노래가 금지된 여성은 텅 빈 객석을 바라보고 있다. 그녀의 노래는 가사가 없고 선율의 일관적인 진행도 없다. 읊조림이었다가, 시간을 쪼개는 박자였다가, 처연한 절규가 되기도 한다. 그 기이함은 전통적인 가곡의 손쉬운 감동을 비웃으며 새로운 전율을 준다. 그러나 네샤트의 초기 비디오작품들이 이항적인 것의 대립으로 정치적 의미를 분명히 했다면, 후기로 접어들면서 명료한 대비는 사라지고 혼재된 것들의 모순을 담아내는 듯 보인다. 세계의 단순명료함과 고정된 관념들을 위반하는 중심에는 여성이 있고, 네샤트는 계속해서 여성의 힘을 믿고 있다. 복잡한 권력과 규율이 교차하는 여성의 몸은 취약하기 때문에 투쟁의 최전선이 될 수 있다. 한때는 버림받은 국민으로 트라우마를 안겨줬지만, 이제는 돌아가려 하지 않으려는(방송 인터뷰)* 모국 이란. 작가 활동 대부분을 서구에서, 서구에 의해 지속하고 인정받았음에도 네샤트의 페미니즘적 문제의식은 이슬람 종교와 문화와 긴밀히 연결된다. 계속해서 경계인으로 망명하며 단일한 정체성이길 거부하는 결단은 그녀의 예술에도 투영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녀만의 도발적이고 모순적인 문법으로.



 


1. 위키피디아의 Ṭūbā 설명 참고. 북서울시립미술관전의 작품 설명에서 '투바'는 "코란에 등장하는 신성한 나무의 이름으로 빈곤한 이들에게 축복과 쉼터를 제공하는 존재"라고 명시되어 있다. https://en.wikipedia.org/wiki/%E1%B9%AC%C5%ABb%C4%81


2.쉬린 네샤트의 TED 연설. 보드라운 목소리로 단순하면서 강단있는 문장을 말해질 때 개인적으로 오묘한 느낌이 들었다. https://www.ted.com/talks/shirin_neshat_art_in_exile?utm_campaign=tedspread&utm_medium=referral&utm_source=tedcomshare


3. 초기 사진작품을 간결하지만 깊이있게 분석했다고 생각한다.<Shirin Neshat, Rebellious Silence, Women of Allah series> by. Allison Young.  https://www.khanacademy.org/humanities/ap-art-history/global-contemporary-apah/20th-century-apah/a/neshat-rebellious


4. 쉬린 네샤트의 개인전이 2014년 MMCA에서 개최된 바 있다. (나는 왜 그 때 이 작가를 알지 못했나!) 당시 전시에 대한 평론 중 가장 인상깊었던 이선영 평론가님의 글. <쉬린 네샤트 / 이슬람과 뉴욕의 또 다른 만남>   http://www.daljin.com/column/11669


5.유투브에서 작품 감상이 가능하다. https://www.youtube.com/watch?v=Xqj_no4Q6rk


6. 이 인터뷰에서 네샤트는 상황이 나아진다면 이란으로 돌아가겠냐는 질문을 받는데, 그녀는 조금 혼란스러워하며(내게는 그녀 자신도 자신이 왜 그렇게 느끼는지 잘 이해할 수 없어하는 듯 보였다) 돌아가지 않을 것 같다고 대답한다. https://youtu.be/WoFouzeYy0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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