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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ul 04. 2021

‘삭제의 정원’의 주인은 누구인가요

마이클 딘의 전시를 다시 생각하다

 



  언제부턴가 SNS에 폐허의 이미지들이 올라오더군요. 버려진 구조물들, 그 표면에 덧대어진 신체의 형상, 찢겨져 나온 페이지들. 버려진 존재들의 무덤처럼 보이던 곳은 영국 작가 마이클 딘(Michael Dean)의 개인전 <삭제의 정원> 공간이었습니다. 호기심이 일어 전시가 끝나기 전날 삼청동의 바라캇 갤러리를 찾았어요. 녹슬고 바래고 썩어가는 작품들 사이에 있자니 기이함이 더욱 강렬하게 느껴졌습니다. 공간 여기저기 널린 작품들을 밟지 않기 위해 조심스레 움직이고 또 대부분 바닥에 뉘여 있어 작품 가까이 몸을 숙여 봐야했어요. 감상을 위해 예측할 수 없는 동선과 지향적인 자세가 요구되는 전시였죠. 사진으로부터 시각적인 충격을 느꼈다면, 실제 전시에서는 그 생경한 충격이 몸 전체로 확장된다고나 할까요. 




    콘크리트를 작품의 주재료로 사용한다는 마이클 딘은 자재를 놓아둔 자신의 작업실 정원에서 이 설치작품의 영감을 얻었다고 합니다. 오래된 콘크리트 조각들을, 그것들이 놓여있는 자연의 일부로 여긴 것이죠. 생물이 가진 자기 생성과 보존의 에너지를 작품 또한 지니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작품은 서서히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 그저 다르게 변형될 뿐이지요. ‘삭제(delete)’라는 단어를 쓴 데에서 작가의 관점을 읽어낼 수 있을 거예요. 작가가 콘크리트를 현대판 ‘팔림프세스트’라고 규정합니다. 이전의 흔적들이 지워지며 새로운 의미가 기입될 수 있는 표면인 것이죠. 즉 작가에게 삭제는 (재)창조의 다른 말인 셈입니다.



    “세계의 모든 물질과 에너지가 질서에서 무질서를 향해 나아간다”는 작가의 믿음을 이 전시와 연결시켜 본다면, 결국 폐기물처럼 보이는 이 모든 잔해는 그 나름의 생명과 가치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 됩니다. 작품으로 만들어졌거나 작업에 동원되었던 기능과 의미를 잃게 되었더라도(삭제), 작가의 의도를 벗어나 다른 가능성을 구축해나가고 있는 잔해들. 이 논지는 창조주에 가까운 작가의 권위와 능력을 과감히 내려놓는 것처럼 들립니다. 오래된 작품과 폐기처분 될 운명에 놓인 자재들의 자율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니까요. 경이로운 회복력을 가진 자연이 그러하듯 파괴와 죽음을 거부하는 저항을 이들 안에서 발견하게 하고요. 그러나 ‘삭제의 정원’의 작가를 겸손한 존재로 받아들여도 괜찮은 걸까요? 




   사실 전시 제목에 개체들의 자율성을 인정하는 태도와 반대되는 단어가 함께 있습니다. ‘정원(Garden)’이란 단어이죠. 정원-정확히는 정원을 가꾸는 원예의 기술(gardening)-은 근대성을 상징하는 용어 중 하나였습니다. 인간의 목적과 계획에 따라 철저히 관리되는 정원은 원초적인 야생의 자연(nature)을 규제하는 문화(culture)의 힘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근대적 장소였죠. 정원의 기원과 그 상징을 상기해본다면 ‘삭제의 정원’은 창조주인 작가의 권위를 모두 내려놓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작품들과 자재들이 소멸하지 않고 스스로를 변형하며 생명을 지속시키는 힘을 가졌다고 할 지라도, 그 힘들이 ‘정원’ 안에 위치하는 한 궁극적으로 그 힘들은 정원의 주인인 ‘작가’에 의해 부여되는 것입니다. 온전한 자율성이 아닌 거죠. 작가가 자율성을 승인해주어야만 가질 수 있으니까요. 



영어 알파벳이 어렴풋하게 보이시나요? 



    전시 내내 느꼈던, 설명할 수 없는 불편함은 ‘삭제’라는 컨셉 뒤에 가려진 ‘정원’의 규제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삭제의 정원>이 설치된 1층을 2층에서 내려다보면 난잡하게 흩어진 것처럼 보였던 잔재들이 알파벳을 형상화하고 있음이 드러납니다. ‘HAPPY BROKE / SADS BONES / WITH STICKS / AND STONES’의 글자는 역시나 삭제가 이끌 새로운 창조를 기쁘게 예감하고 있죠. 그러나 이들이 필요에 의해 동원되고 이용되었다가 유기되고 방치되었다는 점. 그 버려진 물성이 다시금 교묘한 통제 아래 전시된다는 사실이 제게는 모순적이었습니다. 자연의 생명력과 비생물의 힘을 진정으로 옹호한다면 그것의 주인이나 관리자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은 채로 발언 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랬다면 이 작품들이 인간의 신체(손과 발, 성기 등)부위를 과도하게 덧입지 않았을 테고, 언어를 닮거나 담기 위한 고심의 흔적도 가지고 있지 않았을 거예요. <삭제의 정원>을 나오며 폐허가 된 사원을 파괴하는 듯 수호하고 있는 앙코르와트의 나무들과 덩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갤러리의 전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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