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라이 클레어 <망명과 자긍심> 속 몸, 집, 돌
**이 글은 제가 참가하고 있는 페미니즘 세미나와 2021년 1학기 인류학 수업을 수강하며 썼던 글을 일부 다듬은 버전이예요. 원본을 읽고 싶다면 댓글이나 메일로 알려주세요 :)
돌의 물성을 고민하게 된건 일라이 클레어의 <망명과 자긍심>을 읽고 나서부터 였습니다. 가난한 시골의 백인 중상층 노동 계급의 딸이자, 뇌병변 장애를 가진 젠더 퀴어, 친족 성폭력 생존자이자 페미니스트, 시인이면서 환경운동가인 일라이 클레어. 그는 이 에세이집에서 자신의 삶에 교차하는 퀴어, 장애, 인종, 계급, 노동, 생태 등의 다양한 쟁점들을 정교하게 풀어내요. 장애와 성 소수자에 대한 차별과 폭력이 가해지는 삶은 간단하고 깔끔하게 말해질 수 없겠죠. 그는 유년시절 당한 성폭행과 자신의 젠더 정체성 간의 단선적 설명을 경계하고, 젠더 퀴어의 삶을 형성하는 계급적이고 규범적인 모순들을 직시합니다. 다른 정체성에 비해 좀처럼 자긍심을 갖기 어려운 ‘불구(crip)’의 이름에 대해 고민하고요. 이 책은 오늘날 결코 하나의 축으로 설명하기 힘든 다중-쟁점의 문제들을 보여줍니다. 무엇보다 아름다워요. 문장도, 서사의 방식도요.*
일라이 클레어에게 있어 ‘몸’은 가장 문제적 장입니다. 성별이 모호하고 장애를 지닌 클레어의 몸은 빈번히 그의 의도와 무관하게 읽히곤 하니까요. 성인인 클레어는 종종 ‘10대 소년’으로 인식되곤 하는데요, 이는 장애인을 성적인 욕망이 없고 성적 대상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는 편견 때문입니다. 비장애를 중심으로 형성된 폭력적 사고에 클레어는 좌절감을 느끼지만, 그렇기에 자신의 성 정체성이 문제시 되지 않는 오해된 ‘패싱’에 안도하기도 하죠. 몸은 오독되는 표면일 뿐만 아니라 몸의 주인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의 출처이기도 합니다. 부지불식간에 경련을 일으키는 근육,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척추, 경직되는 입꼬리나 발음이 새는 혀, 균형을 잡지 못하고 절뚝거리는 장애의 몸. 이는 장애이냐 손상이냐는 논쟁에 앞서 클레어에게 당장의 불편과 곤경을 야기합니다. 자신의 몸으로부터 느끼는 이질적 감각과 좌절은 타인과 공유하기도 어렵죠. 이렇듯 클레어의 몸은 모욕과 안전, 편안함과 분노가 분리될 수 없는 형태로 엉켜있습니다. 클레어는 이를 어떤 이론이나 모델도 설명해주지 못하는 몸의 ”중요한 감정적 현실”이라고 말합니다.
한편으로는 사회적 구조에 의해 야기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몸의 한계에 의해 야기되는 이러한 물리적 경험들은, 곧바로 좌절로 바뀐다. (…) 이 좌절에서 장애와 손상을 이론적으로 깔끔하게 구분할 수는 없다. 실망이나 당혹감도 그렇다. 어느 괜찮은 날엔 ‘내 몸 안으로 향하는 분노’와 ‘바깥의 일상적인 망할 비장애 중심주의로 향하는 분노’를 분리할 수 있다. 하지만 전자의 분노를 후자의 분노로 바꿔서, 후자를 더욱 타오르게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거나 깔끔하지 않다. (Claire, 2020, p.52)
이를 실감하는 클레어는 몸에 ‘대해’ 이야기하기보다 몸을 ‘통해’ 이야기를 시도해요.** 가령 클레어는 유년시절 자연에서 느낀 감각을 소환해내며, 자신의 몸을 벌목 당한 숲과 병치해 놓습니다. 이는 무분별한 개발로 파괴되는 자연에 젠더와 장애로 멸시당한 자신의 몸을 상징적으로 연계하는 등식 이상의 기능을 해요. 도시에서 외쳐지는 환경운동의 강령은 벌목 산업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소도시의 경제와 삶을 외면하는 경우가 많죠. 그러나 클레어는 고향의 산림과 주민들의 취약한 삶에 대한 애정과 무분별한 개발과 자연의 착취를 막는 운동의 긴요함을 동시에 가지는 혼란을 몸을 통해 서술해내고 있는 것입니다. 옳고 그름, 찬반이라는 명확한 입장을 표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문제들 속에서 클레어의 언어는 몸의 물성과 그 느낌의 차원으로 내려갑니다.
클레어는 “집으로서의 몸”을 추구합니다. 이때 ‘집’은 전형적이고 관습적인 상징이 아니예요. 오히려 집에 대한 낭만적이고 동화적인 환상을 거부하고 있죠. 클레어에게 집은 ‘도둑맞고’ ‘침해당하고’ ‘억지로 떼어내지는’ 장소이며, 불안전하고 불완전함을 인정해야만 하는 곳입니다. 그래야 집은 ‘되찾고’ ‘새로운 이름을 붙이고’ ‘창조해내는’ 곳이 될 수 있으니까요. 클레어는 ‘집=몸’이라는 등식을 빗겨 나가며 끈질기게 이 둘을 미래의 당위로 엮어내요. 성공을 보장할 수 없지만 몸이 집이기를 추구하는 거죠. 그리고 이 집은 폐쇄된 하나의 장소가 아니라 수많은 몸-집들이 모인 집단적 거주지를 닮아있습니다. 교차적 억압과 모순적 정동이 응축된 몸을 자신의 것으로 구축하기 위해 클레어는 다른 몸들과의 연결을 꾀합니다. 특히 자기 혐오와 동정을 ‘자긍심’으로 변환하기 위해 클레어는 역사(특히 프릭쇼) 속 수많은 퀴어, 프릭, 불구의 몸들로 뻗어나가는데요. 이때 클레어의 몸은 개인과 역사를 연결하고 소외된 존재들이 서로 힘을 보태어주는 연대의 단위로 거듭나게 되죠.
집으로서의 몸. 하지만 몸이 결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수많은 다른 몸들이 내 몸을 따라다니고 강조하고 내 몸에 힘을 보탠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몸은 집일 수 있다. (…) 지독한 인종차별과 무분별한 숲과 강의 파괴를 거부하는 바로 그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이런 몸에 애정 어린 소속감을 느낀다. 계속해서 내게 피난처를 제공했던 나무들로 이루어진 몸들 없이, 어떻게 내가 내 몸을 집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퀴어인 몸들 없이? 불구인 몸들 없이? 트랜스젠더이고 트랜스섹슈얼한 몸들 없이, 어떻게 내 몸을 집이라 부를 수 있겠는가? … 하지만 몸은 장소와 공동체 그리고 문화가 우리의 뼛속 깊이 파고들어 있다는 것이 이해될 때에만 집일 수 있다. (Claire, 2020, pp.57-58)
몸의 수사가 은유적 의미를 초과하는 지점에서 ‘돌’은 또 하나의 중요한 함의를 제공해요. 클레어는 폭력과 멸시에 의해 쪼개지고 떠나야만 했던 집으로서의 몸을 되찾는 노력으로 돌을 수집했다고 말합니다. 돌은 단단하고 무거우며 쉽게 변형되지 않는 물성을 지니고 있죠. 주머니에 넣은 돌은 빼앗긴 몸과 상실된 자아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그가 자연으로부터 꾸어왔던 무게와도 같습니다. 그럼에도 이 돌은 자신의 체온만큼 데워지지 않기 때문에 몸에 대해서 언제나 이질적이예요. 따라서 클레어에게 진실된 글쓰기는 “돌을 데웠던 몸에 대해, 그 체온 자체에 대해” 말하는 글입니다. 그러나 돌 아래 살된(bodied) 진실에 닿고자 하는 태도가 돌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클레어는 돌들에게도 자신의 삶의 진실 일부가 깃든 것을 인정해요. 태초의 몸으로 회귀하려 하지 않고, 순수한 본래의 몸을 가정하지 않는 거죠. 집으로서의 몸을 구축하는 시도로 (돌에 대해 그랬던 것처럼) 기꺼이 다른 몸을 나의 몸으로 받아들이며 몸의 상징적, 물리적 경계는 연결되고 확장됩니다.
학대, 비장애 중심주의, 트랜스 혐오, 동성애 혐오가 내 몸을 도둑질하고, 내 욕망을 부숴버리고, 내 피부에 닿은 따뜻한 돌과 썩은 통나무에서 자라는 이끼의 축축한 폭신폭신함과 바위에서 똑똑 떨어지는 샘물의 맛에서 내가 느끼던 기쁨으로부터 나를 갈라놓았다고 말하는 건 차라리 쉽다. 부서진 게 어떻게 치유되는지 이야기하기는 훨씬 어렵다. (Claire, 2020, p.266)
에세이 전반에서 클레어와 자연과의 친밀한 유대는 촉감적으로 서술돼요. 몸이 기억하는 감각들은 클레어에게 “본래의 진실된 몸의 느낌”이죠. 여기서 클레어의 몸과 자연이 맺는 관계는 무척 중요해집니다. 자연을 지향하고 예민하게 감각하는 생태적인 몸은 클레어의 인식론적 토대가 되어주니까요. 이후의 에세이와 두번째 책 < Brilliant Imperfection: Grappling with Cure>(2017)을 통해 클레어는 자연에 대한 감각을 한층 복잡한 교차성을 사유하는 인식의 자원으로 활용해요. 에세이 ‘Notes on Natural Wolrds, Disabled Bodies, and a Politics of Cure’에서 클레어는 자연과의 공생적 삶을 통해 자연이 완벽한 형태의 원초적 ‘자연성’을 지닌 세계가 아니라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최선의 조화와 균형을 이루어 나간다는 점을 강조합니다. 불완전함과 복구불가능성을 부정하거나 평가절하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보아야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거죠. 이로부터 클레어는 장애에 대한 치료의 담론도 손상 이전의 ‘자연적이고 정상적인’ 상태를 가정하고 이를 복구해야 한다는 차별적, 폭력적 전제를 철회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장애학과 의료사회학, 동물학과 신유물론 연구를 조화롭게 벼려낸 이 책의 제목을 상기할 때, 자연, 그리고 자연과 교감하는 몸으로부터 상당한 영감을 얻었다는 것을 부정할 수 없을 거예요.
책을 덮은 이후에도 오래도록 떠올렸어요. 울창한 산림에서, 물살이 느린 계곡의 바위틈에서, 몸을 굽혀 작은 돌을 집어드는 소녀의 등을요. 울퉁불퉁하거나 매끄러운 돌의 겉살을 문질러 닦아내고 소중하게 주머니에 담는 동작도요. 상처입어 텅 비어버린 몸이 이 땅과, 자신으로부터 떠나가지 않도록 잡아두려던 노력. 주머니에서 돌들이 부딪히며 내는 달그락 소리가 클레어에게는 얼마나 아름다운 멜로디였을지 상상하면 가슴이 아리기도 합니다. 그러나 미래를 살아낼 수 있는 무게와 감촉, 향기와 소리를 자연으로부터 구했기에 클레어의 몸은 자신이 아닌 존재를 환대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토대가 될 수 있었던 걸 거예요. 돌이 몸의 일부가 되고, 오랜 역사 속 퀴어와 크립들이 몸 일부가 되었던 것처럼요. 돌담 위에 수많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아 밤새도록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으로 에세이를 끝낸 이유는 그 친밀한 대열 속에 우리 또한 초대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도둑맞은 집을 우리의 집을 되꾸리려는 노력은 그 모든 존재들을 우리의 몸 일부로 삼아야 가능하다는 점을 넌지시 알려주는게 아닐까 싶어요.
*원서 <Exile and Pride: Disability, Queerness, and Liberation>은 1999년에 초판이 발간되었고, 한국에서는 2020년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으로 번역되어 출간되었습니다. 이 글에서 인용하는 페이지는 국내 번역본 기준입니다.
-Clare, E. (2020). 망명과 자긍심:교차하는 퀴어 장애 정치학 (전혜은×제이 역). 서울:현실문화.
**아서 프랭크의 <몸의 증언>에서 차용한 이 개념은 이전 브런치 글을 참고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