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Jun 04. 2017

6. 구시가 이곳 저곳

폴란드 바르샤바

구시가의 광장. 광장 중심에는 랜드마크인 지그문트 3세 기념비가 있다. 오른편은 왕궁.
지그문트 3세가 저높이.


바르샤바의 역사적 영웅(?) 

올드타운의 광장 중앙에는 지그문트 3세(Sigismund III Vasa)의 기념비가 있다. 스웨덴 출신의 왕으로 역사적인 평가는 좋지 않지만, 칭송 받는 결정적인 이유는 폴란드의 수도를 크라코프에서 바르샤바로 옮겼기 때문이다. 천도의 이유야 종합적이겠지만, 노란우산 가이드는 자칭 과학도로 화학실험을 즐겨 하던 그가 폭발로 크라코프의 성 절반을 날려버렸기 때문이라고 했다. 농담이겠거니 했는데, 크라코프의 가이드도 똑같이 말했다. 바벨성 회랑의 개조 흔적을 보여주면서. 


바르샤바 왕궁(Royal Castle)

폴란드의 수도가 되면서 증축된 바르샤바 왕궁은 2차 세계대전 때 한쪽 벽면만 제외하고 완전한 폐허가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시민들의 기부로 왕궁은 가까스로 재건된다. 왕궁 내부로 들어가보면 사면의 건물 양식과 자재가 다른 것이 확연히 느껴진다. 왕궁의 시계탑에서는 매일 오전 11시 15분에 트럼펫 연주가 들린다. 정각도 아닌 애매한 시각에 울리는 것이 의아할 것이다. 11시 15분은 2차 세계대전 첫 폭탄이 바르샤바 왕궁에 떨어진 시각이다. 시계바늘은 11시 15분을 가리키며 35년간 멈춰있었다. 트럼펫이 울리면 광장이 한순간 경건해진다. 지나가던 차량이 모두 멈췄다. 

(위)1945년 알아볼 수조차 없는 왕궁 (아래)복원된 왕궁의 현재


2차 세계대전으로 바르샤바는 도시의 85%가 붕괴되었고, 인구의 65%가 죽었다. 폴란드가 전쟁의 최대 피해지가 될 수 밖에 없던 이유는 지정학적 위치가 크다. 독일의 제국주의와 나치즘, 소련의 공산주의라는 이념의 대립이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위치였다. 폴란드는 국제적으로 이념의 중립을 유지하려고 했지만, 그랬기에 두 강대국의 표적이 된 셈이다.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종

어느 도시에나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무엇이 있기 마련이다. 바르샤바는 종이다. 교회첨탑에 달 목적으로 만들어졌지만 소리가 나지 않아 땅 속 깊이 묻혔던 종. 전쟁의 폭격으로 파헤쳐진 밭에서 발견되어 구시가지에 놓여졌다. 벨에 손을 올리고 오른쪽으로 세 번 돌면서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면 된다고 한다. 한 사람이 하루에 한번만 빌 수 있으며, 소박한 소원일수록 이루어질 가능성이 높다는 설명은 벨의 원칙이라기 보다 인생의 지혜에 가깝게 들렸다.

 


인어상

구시가 안쪽 광장

 바르샤바의 인어는 도시의 수호신이다. 용맹한 기세로 칼과 방패를 들고 있다. 덴마크의 인어와 자매지간이라고 했다. 책임감 강한 언니는 바르샤바에 남아 도시를 지켰고, 호기심 많은 동생은 더 거슬러 올라가 덴마크까지 다다랐다고. 전설이니 믿거나 말거나다. 스톡홀름에서 봤던 인어상은 조금 가냘픈 모습이었던 것 같긴 하다. 


광장

광장을 둘러싼 건물들도 전쟁 후에 모두 복원했다고 한다. 고회화 전문가들이 투입되어 건물의 양식부터 바랜 색감, 자연적인 균열까지 정교하게 작업했다. 얼핏 보면 오랜 세월을 버틴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게 느껴지도록 고도로 채색된 새것들. 대단하다고 느꼈다. 


가운데 주황색 저택에는 딸 셋의 신랑감을 찾는 아버지가 그녀들의 초상화를 창문 아래 각각 그려놨다. 미화된 얼굴일까. 


구시가를 둘러싼 성곽도 모두 새로 쌓은 것.



카틴 학살 추모비

자코비 광장에서 성곽 바깥쪽에 위치한 추모비

소련이 1939년 저지른 폴란드인에 대한 집단학살로, 러시아 카틴마을 인근 숲에서 자행했다. 군인을 비롯해 교수, 경찰관, 목사 등 폴란드의 사회지도계층 약 22,000명을 사살되어 매장됐다. 독일군이 1943년 유해 일부를 발견하고 조사에 착수하면서 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히틀러는 이를 소련의 제노사이드로 규정하고 프로파간다로 사용하기도 했다. 학살에 대한 진실 규명은 이념적, 정치적 대립에 밀려 지지부진하게 진행됐다. 러시아는 관련 내용을 감추거나 부인해왔지만 국제사회의 비판이 거세지자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사과로 볼 수 있는진 확신이 들지 않는다.) 끔찍하여 믿을 수 없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우리 모두는 말을 잃은 채 서 있었다. 아마 같은 마음으로 묵념을 하고 있었을 거다. 

매거진의 이전글 5. 쇼팽, 이 곳의 음악을 부탁해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