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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Oct 30. 2017

누구도 무고하진 않다 (2)

미드 <루머의 루머의 루머>와 책임의 문제

*이 글을 쓰면서 미드 <루머의 루머의 루머>의 스포일러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아직 드라마를 보시지 않은 분들은 제 글에서 '생각할 거리'만 안고 가셨으면 해요. 



 한국에서 번역된 제목 <루머의 루머의 루머>는 이 드라마에서의 ‘진실’에 대한 담론을 부각시키기 위한 노력처럼 느껴진다. 해나는 실상과는 먼 루머들로 학교 생활에서 어려움을 겪는다. 루머는 맥락이 제거된 사진이 돌면서 시작됐고, 출처를 알 수 없는 ‘카더라’ 소문이 일파만파로 퍼지며 악화된다. 아무도 루머가 뒤덮은 진실을 알려고 하지 않을뿐더러 의심조차 하지 않는다. 루머를 흡수하고 퍼나르며 확산시키고 과장하는데 바쁘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자극적이고 재미있으며 쉽기 때문이다. 


 SNS에 최적화되고 소문과 평판에 민감한 10대의 세상에서 놀라운 광경은 아니다. 하지만 청소년만의 문제가 아님을 우리도 너무 잘 알고 있다. 정보를 소비하고 확산시키는 현재의 우리 모습에도 비추어 생각해보아야 한다. 우리는 많은 것을 의심 없이 단순하게 받아들이고 또 검열이나 검증 없이 전달한다. 무언가에 물음표를 던지는 일이나 사실의 이면을 가늠해보려는 노력에서는 멀어졌다. 그것은 어렵고 피곤하며 큰 재미도 없기 때문이다.





도덕의 영역에 산수가 침범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나는 이 드라마를 ‘진실’보다 ‘죄책감’의 담론에서 생각해보고 싶다. 그것이 이 드라마 원제가 <13 reasons why>인 이유와도 관련이 있는 듯 하다. 해나에게 일어난 건 단 하나의 사건이 아니다. 12명의 사람들과 관련된 연쇄적인 사건들이 모두 그녀에게 영향을 미쳤다. 개별적이고 독립적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어떤 식으로든 앞 사건과 연관되어있다. 적어도 영향을 받지않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해나가 자신의 죽음을 설명하기 위해 12명의 사람과 13가지 이유를 조목조목 녹음한 것도 모든 것이 그녀를 해쳤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녀의 테이프를 들은 사람들도 비슷하게 느꼈다. 그러나 해나의 생각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결론을 주었다. 해나가 꼽은 13가지 이유, 12명의 사람은 모두 잘못했다. 그러므로 그들은 죄의 무게와 죄책감도 N분의 1로 나누어 가졌다. 그들은 잘못한 건 자신만이 아니라고 말한다. 해나를 죽음으로 이끈 건 촘촘하게 짜인 사슬이었고, 자신의 잘못은 그 중 하나일 뿐이다. 사슬의 체인 하나에 비난을 하고 책임을 묻는 건 옳지 않다. 모두가 잘못했다는 사실은 그들에게는 자신을 방어하는 핵심적인 변명이 된 것이다. 진실에 대한 압박이 갈수록 심해지자 아이들은 가장 악한 행위를 한 한 명에게 책임을 몰며 가해자의 멍에에서 도망치려고 하기까지 한다. 







 하지만 클레이는 다르다. 13가지의 이유는 해나에게 적어도 13번의 기회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녀를 죽고 싶게 만들었으나 또한 살릴 수 있는 계기이기도 했다. 단 한 명만 다르게 행동했다면, 오직 한가지 사건만이라도 다른 결말을 가졌더라면, 분명 불행의 연쇄는 멈췄을 것이다. 그는 모두가 해나를 죽인 셈이며, 모두가 그에 대한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못이 크든 작든,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클레이의 뒤를 잇는 양심적인 친구 알렉스도 책임을 회피하려는 비겁한 아이들에게 말한다. 12명의 사람 중 단 한 명이라도 해나의 친구로 곁에 남았더라면 결과는 달랐을 거라고. 


 12명의 이들 중 가장 무고했던 클레이는 누구보다도 잘못을 통감하고 괴로워한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다른 사람의 것과 비교하여 평가하지 않는다. 죄책감에는 비교대상이 필요하지 않고 가산도 감산의 셈도 없어야 한다. 도덕은 산수가 개입할 수 없는 영역이다. 12명이 모두 영향을 미쳤기때문에 개개인의 죄질이 그만큼 덜어진다는 건 지극히 이기적이고 비겁한 발상이다. 연관된 이가 몇 명이든간에, 자신의 행동에 잘못이 있었다면 그것은 N으로 나누어질수 없는 절대적인 것이다. 













 여러 성찰을 안겨주는 이 멋진 드라마는 넷플릭스의 자체 제작 드라마다. 청소년 문제, 특히 자살에 대한 문제를 함께 고민하고 해결해나기 위한 고민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논란의 중심에 있다. 술이나 약물, 성과 관련된 장면이나 자살 장면으로 인해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을 받았다. 특히 자살이 미화되고 모방자살을 야기하는 역효과는 피할 수 없었다. 물론 해나의 자살은 사실적으로 그려져 보기에 무척 괴롭다. 그러나 스토리의 전개상 자살이 아이들을 단죄하는 최종해결책처럼 느껴질 수 있다는 점이 위험하다. 


 철학자 에마뉘엘 레비나스는 타인에 대한 나의 책임성은 무조건적이라고 주장했다. 우리는 때때로 타인에게 미치는 우리의 영향력을 과소평가하거나 또는 아예 관심을 두지 않는다. 나와 타인 사이에 보이지 않는 상호작용을 경시하고 관계에서 오는 기본적인 책임을 외면한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의 삶을 비극으로 추락시키는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루머의 루머의 루머> 시즌 2가 기대된다. 혹자는 이 드라마에서 나올 수 있는 흥미로운 소재는 시즌 1에서 바닥이 났다고 한다. 이제 남겨진 것은 남은 자들의 반성과 책임에 대한 이야기니까. 그러나 나는 그것이 진정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기대를 걸어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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