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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12. 2017

무한한 가능성, 드로잉 Drawing

금호미술관 <B컷 드로잉>전



 영화나 책에 대해선 종종 감상을 써왔지만, 전시나 미술작품에 대해 쓴 적은 드물다. 확실한 서사가 있고 그 서사가 나를 특정한 고민의 지점에 데려다 놓으면 이야기하기 쉽다. 그러나 인상과 느낌이 지배하는 세계를 글로 전하는 건 아직도 내게 어렵다. 간혹 강렬한 색채나 윤곽이 모호한 장면으로 다가오는 영화나 책이 있고, 그것들을 정확히 설명해내는데 곤란했었다. 그러나 그 대상이 선과 면과 색채로 이루어진 이미지 자체라면. 이미지가 내 마음에 일으킨 감흥을 읽어내는 일, 그리고 타인과 공유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한 작업으로 여겨졌다. 


 그럼에도 그 신비스러운 작용이 좋아 나는 부지런히 미술관을 가고 작품 앞에 선다. 햇살이 좋았던 어느 가을 날도 금호미술관을 찾았다. 10월 13일부터 <B컷 드로잉 B-CutDrawing>전이 시작했다. 참여한 10명의 작가, 그들의 10가지 작품세계가 모두 흥미로웠다. 그 중 나의 발걸음과 상념을 오래 잡아놓았던 작품이 있었다. 그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불가능에 도전하는 용기이기도 하다. 








  

#1. <새-경계를 넘어>, 허윤희 

<새-경계를 넘어> , 허윤희, 2017, 벽면에 목탄, 가변크기 (작품의 일부만 사진에 담았습니다)


 어떤 과거는 시간이 지나야 명징하게 보인다. 당시에는 이해할 수 없던것들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은 성실하게도 납득할 만한 설명을 안겨준다.반드시 그렇다고 장담할 수 없지만 대부분. 미술에 비유하자면 이렇다. 당시 나는 그려지는 선과 그 선이 만들어내는 움직임에 휘둘렸다. 하지만언젠가는 도화지 전체에서 그 선이 그려진 위치와 상대적인 크기, 결과적으로 그 의미를 보게 된다. 볼 수 있게 된다. 깨달음은 어쩔 수 없다. 늘 조금 늦게 온다. 그건 언제나 무엇을 감당하기 전까지, 어떤 것을 거치기 전까지, 인간은 항상 어리기 때문이다. 


 흐릿하게 이전 드로잉의 흔적이 남아있다. 곱게 포개진 선들은 평면에 3차원의 시간을 구현했다. 목탄은 문질러 닦아낼 수 있어 유연한 재료로분류되지만 한번 그려진 자국은 완전히 지워질 수 없다고 한다. 자연으로부터 온 재료라서 끈질긴 생명력을 품고 있는 것일까. 현재의 순간이 과거의 축적을 전제로 한다는 것을 새삼 되새겼다. 새의 힘찬 날갯짓이 과거의 숱한 시련과 고난을 뭉개고 결국 비상할 거라는 기대를 품게 했다. 나의 흔적을 부끄럽거나 영광스럽게 만드는 건 오늘에 있다. 나는 오늘의 어떤 몸짓으로 과거를 평가 받게 할 것인가. 





#.2 <가로수>, 이해민선

<가로수>, 이해민선,  2017, 가로수 프로타주, 종이에 연필, 40x40cm (9점 중 3점)


 멀리서 보았을 땐 초상화겠거니 했다. 더 다가갔을 때 눈코입이 없는 얼굴을 보고 익명의 실루엣일 거라 생각했다. 충분히 가까워지자 알게 됐다. 익명의 얼굴은 모두 나무였다. 거칠고 투박한 나무의 표피, 그 자체가 그들의 표정이었다. 작가는 프로타주 기법을 사용했다. 가로수의 몸통을 문질렀고, 그들의 무늬를 의인화했다. 작가는 주변화되거나 소외된 사물들을 새로운 형태로 그리거나 재조합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어떤 표정을 짓는지 어느 쪽을 바라보는 지 알 수 없는 사람들. 표정과 시선이 없는 대신 나무의 표피는 질감 이상의 감흥을 만들어냈다. 종이에는 나뭇결뿐만 아니라 그들의 고독함까지 묻어 나온 듯 했다. 메마르고 갈라지고 상처 입은 표피는 영혼의 내벽과 가장 비슷하지 않을까. 크게 자라기 위해 흉해짐을 자처해야 하는 부위. 도시의 수만 개의섬으로 존재하는 가로수의 모습이 그 안에서 살아가는 수만 명의 인간과 다르지 않음을. 익명의 나무, 익명의 사람을 오래 바라보며 생각했다. 





#3. 화폭에서 뛰쳐나온 작품들

<Spellbound Ⅱ>, 지니서, 2017, 장판지, 가변크기 중 일부



 지니서 작가의 <Spellbound Ⅱ>는 자유롭고 부드러운 곡선을 평면으로부터 끄집어냈다. 부피와 무게를 가진 드로잉은 벽에 걸려 있음에도 차르르 흘러내리거나 출렁출렁 반복되는 것 같았다. 작품 설명 속에 ‘공감각적인 리듬과 운율’이란 수식보다 더 적절한 표현을 찾을 수 있을까. 이정민 작가의 월드로잉 <걷는 생각>도 기이했다. 작품은 평면적이었지만 틀에서 벗어나 놓여있음으로써 공간에 움직임을 만들어냈다. 전시 벽에 아무렇게나 내던져진 것 같은 드로잉은 전시 공간을 커다란 도화지로 확장시키고 그 전체에서 마음껏 뛰놀고 있었다. 두 작가는 드로잉이 가진 자유로운 본성이 다른 차원에서 구현될 때 성공적으로 유지되며 독특한 효과를 일으킬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걷는 생각>, 이정민, 2017, 벽면에 먹, 아크릴, 가변크기 중 일부







드로잉이 독립된 회화 장르로 인정받은 건 오래되지 않았다. 드로잉은 줄곧 완성을 위한 ‘예비’ 단계로 여겨져 왔다. 나는 ‘예비’라는 말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완성으로 나아가기 위한 미완성의 상태, 제약도 한계도 없이 완전히 자유로운 형태. 나에게는 드로잉이 완벽하게 완결된 작품 못지않게 아름답게 느껴진다. B컷 드로잉은 드로잉 장르의 매력과 확장의 가능성을 확인할 수 있던 전시였다.  









<B컷 드로잉> B-Cut Drawing 

참여작가: 노상호, 문성식, 박광수, 백현진, 심래정, 이정민, 이해민선, 장종완, 지니서, 허윤희

금호미술관 / 2017.10.13 - 12.31

http://www.kumhomuseu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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