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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Nov 28. 2017

햇빛과 연약함, 내가 매료된 것

넋을 잃고 바라보는 장면에는 늘 햇빛이 스며들어 있다. 

 나는 햇빛을 좋아합니다. 단박에 햇빛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는 반박이 들어오겠지요. 그렇다면 조금 더 친절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나는 풍경에 햇빛이 스며드는 장면을 좋아합니다. 가만히 서서 그 장면만 몇 시간이고 바라볼 수 있을 정도입니다. 태양빛이 충만한 야외에서는 만나기 어렵습니다. 인공조명이 강하거나 외부와의 접점을 최소화한 실내라면 또한 쉽지 않습니다. 밖을 향해 적절히 열린 공간에서라야 햇빛의 스며듦을 지켜볼 수 있는 행운이 주어집니다. 


 햇빛에 대한 매료는 유년시절에서 기인합니다. 유년의 기억에 반 이상을 차지하는 고향집은 조금 기이한 형태였습니다. 슬레이트 지붕을 얹고 회반죽을 칠한 외벽은 투박한 농가의 전형이었습니다. 그러나 집 안에는 외양과는 딴판인 고풍스러움이 있었습니다. 최초의 형태인 한옥의 흔적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넓은 대청과 천장 서까래를 받치고 있는 나무 기둥은 우아함을 간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창호문이 있었습니다.

 

 집 안의 창호는 모두 미닫이였습니다. 외할아버지와 우리 가족, 출가하지 않은 이모들이 함께 사는 집은 여러 겹의 미닫이 문으로 각자의 사적인 공간을 잘게 나눠졌습니다. 제사를 지낼 때면 장지문을 떼어내 마루를 넓혀 커다란 제사상을 차리고 많은 친척들을 맞이했습니다. 여름을 나고 겨울을 난 후에는 집 안의 창호를 모두 떼어내고 누래진 창호지를 찢어냈던 기억도 희미하게 납니다. 하얗고 빳빳한 새 한지를 바르는 일은 묵은 계절의 때를 씻고 시작을 다짐하는 의식처럼 느껴졌지요. 


 남향이었던 고향집에서는 빛을 구걸해본 적이 없습니다. 햇빛은 식구의 일원처럼 집 안에서 제 나름의 부피를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대청은 그 중에서도 볕이 가장 잘드는 공간이었습니다. 그곳에 가만히 누워있으면 햇빛으로 촘촘히 엮인 볕의 비단이 몸 위를 덮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나는 거기 길게 누워있기를 좋아했습니다. 서귀포 바다내음이 실린 바람의 진득한 점성과 볕의 온기를 함께 느끼는 것은 아마 당시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호사가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물론 백지 상태의 어린 아이는 그것이 섬세하고 고상한 행위인줄은 전혀 몰랐을 테지만요.   


 나는 거기에 누워 창호문을 보았습니다. 창호문을 통과하는 햇빛을 바라보았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입니다. 창호문의 한지는 햇빛이 자신을 선명히 드러낼 수 있게 하는 도화지였습니다. 새벽녘은 한지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습니다. 푸르스름하게 질린 한지는 가끔 파르르 떠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때로는 오소소 소름이 돋아있는 것처럼 보이기도했습니다. 그러나 하늘 위로 해가 당당하게 떠오르면 빛에선 신비함이나 신중함은 사라졌습니다. 정오의 햇빛은 용맹스럽게 지상에 내리 꽂혔고, 문지방 근처에는 미처 한지를 통과하지 못한 빛의 파편들이 우수수 떨어져있곤 했습니다. 빛의 향연은 바랜 한지까지 새하얗게 빛나게 만들었습니다. 때론 눈이 부실 정도였지요. 


 해가 기울수록 볕은 기력을 잃었습니다. 서너 시 경의 햇빛은 겨우 창호문 문양에 걸터앉는 것처럼 노쇠하게 느껴졌습니다. 그 노쇠함은 한지까지 누렇게 물들였지요. 어느 때보다 한지 위로 드리워지는 문양의 그림자는 길었고, 문양의 깊이도 더욱 깊어졌습니다. 사라져야 할 때를 안 햇빛은 겸손해집니다. 그리고 겸손한 빛과 그 빛이 만드는 그림자는그 자체로 경건합니다. 석양의 꽁무니가 어둠 속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출 때까지, 빛과 함께 사라지는 온기의 자리에 으슬으슬한 한기가 몰려오는 것을 알아차리며. 나는 종종 빛이 밀려오고 사라지는 느린 사건의 목격자가 되곤 했습니다.

 

 창호문의 얇은 한지는 내게 꼭 나비의 날개처럼 느껴졌습니다. 손가락으로 살짝 힘을 주어 잡으면 으쓱 깨어지는 얇은 날개. 날개는 결마다 무수히 오묘한 빛깔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빛깔은 햇빛 아래 가장 화려하게 빛납니다. 그건 날개에 빛이 통과할 수 있는 연약함이 있기 때문이지요. 한지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찢기기 쉬운 얇은 재질이기 때문에 한지는 빛을 최대한 많이 받아들일 수 있고, 그를 받아들임으로써 다양한 색깔로 스스로를 물들일 수 있습니다.

 

 내가 매료되었던 것은 어쩌면 햇빛뿐 만이 아니라 그 햇빛을 최대한 온전히 투사하고 투영할수 있었던 한지까지인 지도 모르겠습니다. 연약한 존재일수록 타자를 더 잘 받아들일 수 있다는 사실을 직관적으로 배웠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연약함이라면 다른 이름의 강인함일 수 있겠지요. 아니, 강인함일 것 입니다. 위험을 감수하더라도 자신 안에 내재한 모든 빛을 내뿜고자 하는 의지. 그것은 나와 세계를 향한 신뢰와 용기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까요. 


 여전히 나는 공간에 스며드는 빛이 있으면 마치 홀린 것처럼 넋을 잃고 바라봅니다. 고층 빌딩이 하늘을 가리고 작은 면적마저 최대한 잘게 나눠 쓰려 애쓰며 풍경을 담을 수 있는 커다란 창은 사치가 되어버린 도시. 그리고 그 팍팍한 도시 안의 삶에서는 햇빛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여유조차 갖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어느 공간에서든 햇빛의 방문을 만나면 여간 반가운 게 아닙니다. 빛의 온화한 색깔, 그 위에 서리는 온기, 빛으로 인해 겨우 모습을 드러낸, 나폴거리는 공중의 먼지와 깊이를 부여받는 사물들. 나는그 장면을 오래 응시하며 나 또한 충만하고 평화로운 순간의 일부가 되길 바래봅니다. 그리고 어김없이 유년의 창호문을 떠올리며 나는 얼마나 연약한지, 그 연약함은 동시에 얼마나 강인한지 문득 가늠해보곤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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