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Dec 02. 2017

생명을 이끄는 곳엔 언제나 빛

영화 <빛나는>


 

 미사코는 시각장애인을 위해 영화의 해설을 쓰는 작가입니다. 어린 그녀가 맡게 된 작품은 하필 노년의 감독이 찍은 자전적 성향이 강한 영화입니다. 그녀는 열심입니다. 영화를 몇 번이고 돌려보며 가장 적절한 설명을 고민하고, 일상의 풍경을 해설로 옮기는 연습도 틈틈이 합니다. 그러나 영화의 해설 모니터 모임에서 그녀는 지적을 받습니다. 지적은 사소한 단어선택부터 영화에 대한 그녀의 주관적 해석까지 다양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혹독한 지적은 나카모리에게서 나옵니다. 그는 냉철하고 거친 표현으로 그녀의 부족함을 꼬집습니다. 자존심이 강한 그녀는 그와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웁니다. 


 나카모리는 아직 완전히 시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동공 아래 닫히지 않은 작은 틈으로 그는 겨우 밖을 볼 수 있습니다. 희미하고 부연 형체가 그가 볼 수 있는 마지막 세계입니다. 그는 그 틈마저 닫힐까 절박합니다. 사진작가였던 그는 여전히 자신의 카메라를 들고 불분명한 실루엣으로나마 피사체를 잡습니다. 그의 영광이었고 그의 이유였으며 그의 삶이었던, 세계를 바라보던 시력을 잃게 된다면. 그는 절망에 빠질 겁니다. 대체나 회복의 가능성이 없는 그런 아득한 절망. 


 미사코는 우연히 나카모리가 찍은 석양 사진을 봅니다. 그리고 실종된 아버지의 지갑에서 발견한 사진과 비교해봅니다. 빛 바랜 사진 안에는 어린 미사코와 젊은 아버지가 일몰을 뒤로한 채 서 있습니다. 역광의 사진에서 그들의 얼굴은 어둠에 가려 있지만 분명 웃고 있었을 겁니다. 행복은 거기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가 실종되고 어머니마저 정신을 놓은 뒤, 분명했던 행복도 사라졌습니다. 그건 미사코가 처음 겪은 상실이었습니다. 미숙한 그녀는 그저 남겨진 아버지의 소지품을 전부 외우는 것으로 슬픔에 대처했습니다. 그녀는 나카모리에게 석양을 찍은 곳으로 데려가 달라고 합니다. 그가 시력을 완전히 잃고 어떠한 희망도 그에게 남겨져 있지 않았을 때였죠. 그는 그녀의 요청에 응합니다. 둘은 함께 산을 오릅니다. 






 미사코는 어렸습니다. 모른다는 것, 경험하지 못했다는 것은 그 자체로는 죄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누군가를안내해야 할 때에는 문제가 될 수 있지요. 그러나 그 무지로 인해, 그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는 사람들까지 길을 잃게 한다면 그건 잘못이 됩니다. 미사코의 영화 해설은 그래서 중요했습니다. 감독이 만든 영상을 보지 못하는 시각 장애인들은 아무리 청각에 예민할지라도 영화의 전개와 섬세하고 미묘한 선들을 따라잡기는 불가능하죠. 그들은 해설에 의지합니다. 해설이 길을 잃으면 그들은 영원히 그 영화에 닿을 수 없게 되는 겁니다. 


 미사코는 영화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아니, 제대로 느끼지조차 못했습니다. 모니터 요원 중 한 명이영화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고 물었을 때 그녀는 얼버무렸습니다. 감독을 만나 마지막 장면에 대한 설명을 들었을 때도 그녀는 실례가 될 법한 엉뚱한 대답을 합니다. 그녀는 영화주인공이 모래언덕 정상에 겨우 올라 하늘을 올려다보는 모습에 자의적으로 희망을 덧댑니다. 하지만 정작 영화주인공의 표정은 공허하고 감독도 희망 같은 건 의도하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나카모리는 그녀의 해설이 억지로 희망을 강요한다며 편협하다고 비난하기도 했지요. 


 끈질기게 살고자하지만 당장 죽을 수도 있고, 살고 싶지 않아도 차마 죽지 못하는 삶의 완강함. 그리고 그러한 삶을 살아내야 하는 인간의 곤혹스러움을 그녀는 몰랐을 것입니다. 그건 그녀가 이기적이거나 꽉 막힌 사람이거나 감수성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그저 그런 깨달음이 아직 그녀에게 오지 않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녀는 상실과 체념, 순응과 의지 같은 것들이 뒤범벅된 복잡한 인간의 얼굴을 '희망'이란 한 단어로 단순화해버렸습니다. 순진한 단순화가 그 너머의 심오함을 싹둑 잘라버린 거지요. 


 그러나 그녀는 나카모리가 남아있던 시력마저 완전히 잃었을 때 두려움에  떨며 그녀의 손을 찾아 쥐던 모습을 봅니다. 흐릿한 윤곽조차 훔쳐볼 수 없게 되자 손으로 그녀의 얼굴을 더듬고 감각으로 마지막 사진을 찍는 것도 지켜보았습니다. 타는 듯한 석양 앞에서 아끼던 사진기를 던지고 더는 부질없는 욕심을 놓아버리는 그. 그녀는 차츰 알아갑니다. 상실의 무게와 그것들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숭고함을. 그리고 그것들을 사랑하는 방법을. 

 

 나카모리는 이제 완전히 앞을 보지 못합니다. 육교 위에서 미사코가 그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에게 내려가겠다는 그녀를 그는 막아세웁니다. 그리고 소리칩니다. “내가 제대로 갈 테니” “거기서 기다려요.” 그는 지팡이로 길을 더듬으며 한발자국 한발자국 신중하게 내딛습니다. 그 걸음은 어쩌면 영화 주인공이 계속해서 무너지는 모래 언덕을 올라가는 걸음과 같을 지도 모릅니다. 희망보다 절망적이고 체념보단 용기와 의지가 깃들여있는. 그것은 원한 적 없고 예상하지도 못한 고난을 받아들이되 삶을 포기하지 않는 끈질긴 생명의 동작일 것입니다. 미사코는 그들을 바라보며 한 뼘 성장합니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 해설의 마지막 문장을 완성하고 맙니다. 


 절대 살아가길 멈추지 않는 생명, 그들을 이끄는 것은 빛. 그들은 빛을 바라봅니다. 






 영화는 복잡하지 않지만 곱씹을수록 심오합니다. 감독은 등장인물을 통해 자신이 믿고있는 영화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발언합니다. 관객을 어느새 영화 속의 세계로 빨아들이고 그 세계의 일원이 된 것처럼 느끼게 하는 영화의 매력. 그건 미사코가 나카모리의 삶에 발을 들여놓고 그를 통해 성장하는 것과 비슷한 모습입니다. 영화는 우리가 미처 알지못하는 심연들을 경험하게 하고 그를 통해 우리의 생각과 마음을 한뼘 자라게 합니다. 감독은 영화의 심오한 세계를 단순한 언어로 축소시키는 것은 굉장한 실례라고 말하기도하죠. (그래서 이 영화에 대해 쓰는 것이 더 조심스러웠어요) 관객에게는 영화와 더욱 정중히 만나기를 바란다는 감독의 바람이 담겨있습니다. 동시에 자신의 마음을 다잡는 것처럼도 보여요.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영화를 최선을 다해 진중하게 만들어내겠다고요.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자연을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끌어들이는 듯 합니다.  <소녀와 소년, 그리고 바다>에서는 바다를 통해 어른이 되어가는 아이를 그려냈고, <앙: 단팥 인생 이야기>에서 주인공 도쿠에 할머니는 자연의 언어를 읽어내는 혜안을 가지고 있습니다. <빛나는>에서는 자연이 -빛과 바람과 나무와- 새로운 깨달음을 주는 터전이자 계기이지요. 자연을 마주할 때 느껴지는 겸허함은 인간에게 꼭 필요한 자세로 감독은 생각하고 있는 듯합니다. 현대에서 인간이 자연 안에 있는 일은 드물어지고 겸허한 마음에 젖는 기회도 적어집니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자연에 대한 감응을 선사하고 그 중요성을 끈질기게 전하고 싶어하는지도 모릅니다. 감독에 대한 이야기, 감독이 만나게 해줬던 자연에 대한 이야기를 언젠간 꼭 써보고 싶네요. 

매거진의 이전글 햇빛과 연약함, 내가 매료된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