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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Dec 12. 2017

미국과의 악연: ESTA 거부

나는 미국에 갈 수 없나요?


 내게 미국은 여행지로서 매력적인 곳은 아니었습니다. 미국에 대한 편향된 이미지를 가지고 있긴 했지만, 언젠가 방문을 하더라도 여행이 아닌 관광의 국가가 될 것이라 생각했지요. 그래서 미국은 나의 위시리스트 상위에 있지 않았습니다. 내가 누릴 수 있는 모든 여행 카드를 다 쓴 후에 미국을 관광해도 늦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있던 중이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미국 방문의 기회는 빨리 찾아왔습니다. 2016년 부모님께서 설 연휴기간의 여행지로 뉴욕을 점 찍으면서 시작됐지요. 우리 가족은 자유여행을 철칙으로 하기 때문에 여행 준비에 많은 공을 들입니다. 평상시처럼 나도 준비에 큰 몫을 해야 했지만, 당시 직장 일로 매우 바쁜 시기여서 그 여행을 위해 내가 한 일은유일하게 ESTA 발급을 신청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무비자 여행이 가능했던 미국이지만 국가 차원의 보안을 강화하면서 2009년에 도입된 것이 전자여행허가제(ESTA)입니다. 온라인을 통해 인적 정보와 여행 정보 등을 입력하면 무비자로 여행을 할 수 있는 지 여부를 승인하는 제도로, 신청 후 보통 10~15분 만에 승인이 날 정도로 간단합니다. 물론, 특별한 문제가 없다면 말이죠. 



 뉴욕행 비행기와 호텔 예약을 마치고 여행을 3주 정도 앞둔 평범한 오후, 우리 가족은 함께 ESTA 신청을 했습니다. 질문 문항은 어렵지도 까다롭지도 않았고 5분도 안되어 신청절차가 끝났지요. 심사가 진행 중이라는 화면은 돌아가고 아빠, 엄마, 동생은 차례로 ‘accept’ 되었다는 전갈을 보내왔습니다. 나도 그들의 뒤를 이을 것이라 당연히 자만하고 있었는데, 한참 후 전환된 화면 중앙에는 ‘reject’단어가 떠 있었습니다. 어랍쇼. 나는 눈을 꿈뻑거리며그 믿을 수 없는 통보를 확인하고 또 확인했습니다. 


 그 후 발등에 불이 떨어졌지요. ESTA를 거절당하면 미대사관을 통해 정식으로 관광 비자를 발급 받는 차선책이 남아있습니다. 나는 가능한 가장 빠른 인터뷰 날짜를 예약했습니다. 방학 기간에는 인터뷰가 많아 1~2주 안으로 예약하는 일도 어려운데, 나는 운 좋게 10일 후 인터뷰를 볼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에 통과하더라도 비자를 발급받기까지 통상 5~7일은 걸리기 때문에 넉넉한 일정은 아니었습니다. 가족관계증명서와 재직증명서, 여행일정표까지 나의 미국 방문이 거부당해야할 이유가 없음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들을 닥치는 대로 준비했습니다. 





 대망의 인터뷰날이 다가왔습니다. 나는 아버지께 최악의 경우 내 항공권만 취소하고 가족 여행을 다녀오시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아버지는 남몰래 예약한 항공권과 호텔들의 환불규정을 알아보고 계셨지만요.) 내 이름이 불리기 전 까지 대기석에 앉아 가족이 함께 신청한 ESTA에서 나만 거부당한 이유를 파악하려 애썼습닌다. 결혼 적령기의 미혼 여성이라서? 보스니아, 사라예보, 세르비아 등 동유럽의 분쟁국가를 여행한 이력 때문에? 나는 언제든지 회사에 사표를 낼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고, 마음에 든 여행지에는 어렵게 짠 계획도 아랑곳 없이 더 오래 머물기도 하는 기분파인 건 사실이지만, 나의 성향이 그 간단한 ESTA 질문 문항으로는 드러날 리 없어 보였습니다. 30분쯤 지나자 손에 쥐고 있던 대기표의 번호가 불려졌고, 나는 심호흡을 크게 하며 창구로 걸어갔습니다. 


 인터뷰이는 내가 건넨 서류를 건네 받고 이번 여행과 기본 신상에 대해 질문을 했습니다. 특히 내가 하는 업무와 사회생활에 대한 질문을 집중적으로 했지요. 대답하는 와중에도 조금 의아했습니다. 업무의 성격은 어떠하며, 일에서 얻는 만족과 스트레스는 어떠한 지, 동료들과는 잘 지내는지 등. 관광비자를 발급하기 위해 궁금해할 만한 점들은 아닌 듯 했으니까요. 질문에 대한 의구심이 스멀스멀 올라왔지만 나는 성실히 대답했고, 결국 그녀는 ‘이정도면 된 것 같네요. 충분해요.’ 라며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 한 마디에 그간 졸였던 마음이 순식간에 풀리고 온 몸이 스르르 녹아내렸습니다.


 검토했던 서류들을 다시 정리하는 그녀의 얼굴이 하루의 수많은 일 중 하나를 완수했다는 소박한 보람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조심스럽게 물었습니다. 


“혹시 불가능하지 않다면, 제가 ESTA 거부를 당한 이유를 알 수 있을까요?”


“이유를 알려줄 의무가 우리에겐 없어요. 정확히도 알지 못하지만요. ”


“제가 아무리 생각해봐도 저는 결격사유가 없는 것 같아서요.”


“음..”


그녀는 마우스 스크롤을 내리며 모니터를 다시 한 번 신중하게들여다보았습니다. 


“내 생각엔 당신이 실수한 것 같아요.”


“네? 어떤 실수요?”


“당신이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체크했거든요.” 



 나는 할 말을 잃었습니다. 당황한 나머지 표정까지 굳어버렸죠. 그녀는 내게 눈을 찡긋 하며,


 “대화해보니 그런 것 같진 않더라구요. 문제 없을 거예요.” 


위로 아닌 위로를 건네주었습니다. 물론 이 실수는 부모님께 말하지 않았습니다. 부끄러워 털어놓을 데도 없었지요. 주변에서는 나를 강화된 이민 정책의 불운한 희생양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제야 이 곳을 빌어 고백합니다. 모든 것은 나의 실수였다고. 

여러분, 간편한 ESTA 신청할 때 자만하지 말고 한 번, 두 번, 세 번 꼭. 문항과 답변을 체크해주세요. 꼭이요.


  


ESTA 거부 덕분에 요즘 희귀하다는 VISA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만 REJECT 기록이 VISA와 끝까지 남는다는 것. (*ESTA RECORD REVIEW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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