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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Sep 06. 2016

들어주시겠습니까?

바람처럼, 정중한 노크 소리

 그러니까, 자기 검열 없이 늘어놓겠습니다. 잠시의 망설임만 허락하고 한번 써 내려간 문장에서 뒷걸음질 치지는 않겠습니다.


 나는 지쳐있습니다. 회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몸에 찬물을 끼얹으니 한낮에 그대로 받아냈던 고온과 습기가 그제야 가시는 듯했습니다. 시침과 분침이 열한 시 가까이를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대로 잘 수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럴 수 없었다고 하는 편이 정확할 겁니다. 나는 4kg의 노트북을 배에 얹고 말을 시작합니다. 개운한 잠은 말이 모두 끝난 마지막 순서로 오게 될 것입니다.     



 처음에는 새벽에도 번뜩 깨어나곤 했습니다. 우리 집 현관문은 걸쇠가 헐겁습니다. 바람이 강한 날에는 심하게 들썩입니다. 마치 성난 사람이 문을 사납게 두드리는 소리가 납니다. 바람의 사이가 먼 날에는 문고리를 거칠게 잡아당기는 소리처럼 들리기도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둠 속에 몸을 숨기고 까치발로 현관까지 나아갔습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들킬까 두 손으로 가슴을 지그시 누른 채로 말입니다. 나는 신발장 뒤에서 가만히 문을 훔쳐보았습니다. 문 뒤에는 두려워할 존재가 없었습니다. 모든 게 바람의 짓이었습니다.



 비슷한 새벽들이 몇 차례 반복된 후에 나는 더 이상 속지 않게 되었습니다. 철제가 부딪히는 충돌음이 유독 날카로울 때는 연약한 잠이 찢기곤 했습니다. 그러나 그럴 때에도 발딱 이는 왼쪽 가슴에 오른손을 가만히 얹고 다시 눈을 감으면 그만이었습니다. 괜찮다. 괜찮다. 중얼거리면 잠은 못 이기는 척 다시 돌아왔습니다.



 형태도 없는 바람이 가진 힘은 놀라웠습니다. 그가 다양한 양상으로 힘을 발현할 수 있다는 게 경이로웠습니다. 바람이 심한 날이면 다른 대상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있는 그의 운명을 생각하곤 했습니다. 한 번은 꿈을 꾸었습니다. 문소리에 깼다 다시 잠이 든 새벽녘이었습니다. 굉음을 내며 흔들리던 문이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습니다. 잠깐의 정적 후 들려온 건 노크소리였습니다. 그 소리가 너무나 정중해서 나는 문을 열어줄 수밖에 없었습니다. 문 앞에는 아무도 없었고, 작은 잎사귀 하나가 현관 바닥에 떨어져 있었습니다. 나는 물끄러미 그 잎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러자 잎은 만족한다는 듯 새침하게 돌아서더니 가볍게 날아올랐습니다. 잎은 총총히 사라졌습니다. 잎의 비행이 눈꽃의 그것처럼 가벼워 나는 눈치챌 수 있었습니다. 바람이, 이야기를 했던 거라고. 이건 바람의 언어라고 말입니다.



 지난밤은 요 근래의 바람 중 가장 심술궂었습니다. 어쩐지 잠들 수 없던 나는 현관문 앞에 쪼그려 앉았습니다. 요란스레 덜컹이는 현관문을 바라보며 바람의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무엇이 그리 고통스러운지 알 수 없었으나, 울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고통을 나누려는 울부짖음이었습니다. 새벽이 깊어지도록 함께 울던 나는 까무룩 잠이 들었습니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나는 현관 앞에 모로 누워있었습니다. 말끔한 햇빛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었습니다. 고통스러워하는 소리가 모두 씻겨나간 자리는 고요했습니다. 그 청명함에 머리가 핑- 돌 정도였습니다. 지난밤이 아득하게 느껴지는 아침. 밤의 번잡함이 거짓말처럼 느껴지는 초연한 빛깔의 아침. 이런 아침이면 나는 천천히 뒷목을 쓰다듬으며 깨닫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이 고요를 채워야 하는 순서가 내게 돌아온 것이라고. 이제는 내가 고백을 해야 할 차례라고 말입니다.      




 들어주시겠습니까? 나는 말하겠지만 모두에게 공평하게 들리지는 않겠지요. 나는 헐거운 문만을 흔들 수 있을 겁니다. 그러니, 당신의 문을 살짝만 열어두세요. 나에게 아주 사소한 틈을 허락해주세요. 그렇담 언젠간, 아주 늦어버리지 않게, 나의 목소리가 당신의 세계에 닿게 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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