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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Jan 18. 2017

작은 변화

퇴사 후 찾아온 삶의 작은 변화


아침에 일어나면 원두 한 움큼을 그라인더에 갈고 473ml 텀블러 가득 커피를 내립니다. 곱게 간 원두에 갓 끓인 물을 부으면 커피가 한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합니다. 텀블러 안에서 들리는 통, 통, 통, 소리는 생기가 넘칩니다. 처음엔 우수수 몰아치는 소리가 점점 간헐적으로 들리고, 결국은 멎게 되는 그 길고도 짧은 시간을 나는 좋아합니다. 그 시간 동안 집안은 평화로운 향기로 물듭니다. 


종일 집에 머무를 때면 작은 머그잔에 텀블러의 커피를 조금씩 따라 마십니다. 회사에 다닐 때는 Tall 사이즈 3~4컵은 늘 마셨는데, 요즘은 내린 커피를 남길 때가 더 많습니다. 미팅 때문에, 기분전환 때문에 또는 함께 있는 사람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마시는 커피가 아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루의 정량을 정해놓은 것도 아닌데, 조금씩 덜 마시게 됩니다. 외부에 내주었던 일상의 주인자리를 되찾으니, 생각보다 많은 것이 필요하지 않아졌습니다. 


텀블러라도 영원히 따뜻함을 유지할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아침 9시에 내린 커피는 정오가 넘어가면 열기를 잃고 식어갑니다. 그러나 오후 2~3시께가 되어 커피를 머금었을 때, 입 안에서 느껴지는 온기에 놀라곤 합니다. 아주 옅지만 그래도 온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 남아있습니다. 나는 텀블러가 아주 온기를 잃게 되기까지 지켜볼 수 있는 하루를 살고 있습니다. 늦은 오후까지 커피는 남아있고, 텀블러는 최선을 다해 온기를 지켜내며, 나는 해가 저물어 갈 무렵에도 텀블러에 다 마시지 않은 커피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먹고 싶었던 과일이나 원하는 제품이 다 떨어졌을 때, 나는 괜찮다고 웃고 맙니다. 이전에는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일 투성이었고, 분초를 다투는 전투가 삶인 것 같았습니다. 지금 우선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는 건 그만큼 뒤로 미뤄놓아야 할 일들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나는 기다리기보다 기다리게 하는 사람에 가까웠습니다. 아니, 기다릴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는 게 더 적절한 표현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요즘은 ‘지금은 안됩니다’라는 말에, ‘네,그럼 다음에 해주세요’라고 웃으며 대답합니다. 나의 일상에 ‘다음’이라는 너그러운 여유가 돌아왔고, 나는 기다릴 수 있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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