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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mi Feb 08. 2017

성녀를 자처해야했던 한 소녀의 사정

ㅡ쿠라하시 유미꼬의 『성소녀 (聖少女)』


미국 유학을 위해 비자 발급을 기다리는 K에게 어느 날 노트 한권이 속달로 배달됩니다. 발신인은 미키. 보조석의 엄마가 즉사한 교통사고에서의 부상으로 몇 년간의 기억을 잃어버린 소녀입니다. 소녀는K에게 암호에 다를 바 없는 일지의 내용을 해독해주길 부탁합니다. 노트를 사실의 진솔한 기록으로 받아들여야 할지 정교하게 짜인 소설로 읽어야 할지 K도 독자도 알지 못합니다. K는 미키의 과거-그조차 제대로 알 리 없는-를 재건하려고 하지만, 사실과 환상의 모호한 경계에서 길을 잃는 여정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짧은 호흡의 문장, 경쾌한 은유와 섬세한 묘사. 읽는 이를 진실과 허구의 탐사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때문에 작품은 빠르게 읽힙니다. 그러나 결말로 향할수록 혼란은 커져가고 모호한 이야기 끝에 분명하게 남는 것은 인물들뿐입니다. 『성소녀』는 근친상간이라는 파격적인 소재를 다루지만 정작 작품 안에서는 이 죄악 자체에 대해서는 깊이 다루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죄를 자처하는 주인공의 ‘자발적 의지’에 대해 고뇌합니다. 미키는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기 보다는 이 범죄를 선택했다고 표현합니다.미키는 K에게 묻습니다. 금지되어 있는 일을 굳이 하려는 사람을 ‘성녀’라고 할 수 있지 않느냐고요.이 질문은 작가가 독자에게 던지고 싶었던 날 선 화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우리의 평범한 일상에서 떳떳하게 우리의 ‘의지의 결과’라고 말할 수 있는 부분은 얼마나 될까요. 


작품 안에서 지배적으로 등장하는 개념 –혹은 이미지-이 있습니다. 바로 공백입니다. 공백은 있어야할 것이 부재한 시공간을 의미합니다. 작품 안에서는 여백, 구멍 등의 공간적인 개념에서 공허, 허무 등의 정서적, 인지적 상태까지 확장됩니다. 기억을 잃은 미키가 자신의 상태를 정의할 때에도, 상실을 경험한 등장인물의 감정 상태를 묘사할 때도. 무언가가 들어와 채워져야 하는 구멍이란 이미지도, 삶의 허무와 공허함을 말하는 지점에서도 이 개념이 반복적으로 등장합니다. 『성소녀』의 주요 인물들은 자신들의 삶 속에 존재하는 공백을 응시하는 이들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채우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지요.그 시도가 파괴적이든 자학적이든 비윤리적이든 위선적이든 개의치 않고요. 


윤리의 한계선을 넘어선 그들의 몸부림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동시에 측은함까지 느껴집니다. 그것은 그들이 죽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있기 위해서 발악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공허의 반대말이 실존이라는 것을, 이 작품을 읽고 뒤진 사전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세상에 체념한 듯한, 혹은 될 대로 되라는 식의 서늘한 문체로 작가가 도착하고 싶었던 곳은 생생한 삶, 온전히 살아있는 삶으로의 욕망이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성소녀』는 자신의 선택과 의지에 의해 추동되는 삶만이 주체적인 삶이 될 수 있다는 대수롭지 않은 진리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합니다. 미키는 자신을 가장 극단적인 곤경, 죄악으로 내몰면서 제 나름대로 삶의 허무를 극복해보려고 했습니다. 우주의 전지전능한 신이 되지 못하는 대신 그의 가장 충실한 존재, 즉 성녀가 되려고 했던 것이지요. 하지만 그마저도 실패로 끝을 맺어야하자 그녀는 스스로 미치려고 작정합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미국행대신 결혼을 선택한 K의 결심에 따라 그녀는 존재적 자살을 얼마간 유예하게 되지만요. 

소설은 식물적인 교합을 마친 K와 미키를 내려다보며 끝납니다. K의 마지막 독백처럼 그들에게는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밤이 끝나고 해가 다시 떠올라도, 그들이 그들 자신이기를 포기하고 웅크리고 있는 한. 생에 대한 짐승 같은 욕망을 잃고 현실에 순응하게 된 이상. 남은 일생은 죽음으로 향하는 진부한 시간일 뿐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고 나면 이야기가 주는 충격만큼이나 강렬한 질문이 가슴을 관통합니다. 나는 과연 살아있는가? 하는.


-20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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