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Limi Mar 01. 2018

2. 양곤 순환열차: 여행자의 기본에 대하여

고집스럽게, 나의 버마

양곤 중앙역 선로와 역 내 대합실 풍경.



 오전 9시 30분 중앙역에서 양곤 순환열차에 올라탔습니다. 7번 플랫폼으로 오간다는 열차는 그날 도착 직전 플랫폼을 바꾼 모양이었습니다. 차장의 다급한 수신호에 7번 플랫폼에서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기차 선로를 밟고 건너 4번 플랫폼으로 우르르 이동했습니다. 도착한 열차가 순환 열차가 맞는지 확인하는 승객들의 비율은 내국인과 외국인 모두 비슷해 보였습니다. 1호칸에 비교적 빨리 올라탄 저는 운 좋게 자리에 앉았습니다. 미국의 노부부들로 이루어진 단체 관광객과 시장에 내다 팔 채소나 과일을 바구니에 안은 미얀마 상인들로 내가 탄 칸은 금방 찼고, 서서 가는 승객도 제법 생겨났습니다. 


 활짝 열린 창은 열차의 에어컨이나 환풍기를 대신하고 있었습니다. 텁텁한 열기나 매캐한 연기, 모래먼지는 부산물이었죠. 소도시부터 판잣집, 노천시장과 끝없는 논밭까지, 창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도 다양했습니다. 열차가 서는 역간 거리는 그리 멀지 않았고, 모든 역이 타고 내리는 사람들로 분주했습니다. 칸을 옮겨 다니며 승객들에게 과일이나 군것질거리, 책자를 파는 상인들도 많습니다. 외국인은 흥미롭게, 내국인은 친숙하게 그들을 대했습니다.  


 양곤 순환열차는 서울의 지하철 2호선처럼 양곤 도심과 근교를 타원형으로 길게 도는 열차입니다. 다만 오직 한 방향으로 운행되기 때문에 탔던 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열차가 선로를 한 바퀴 다 돌 때까지는 타는 수밖에 없습니다. 한 바퀴를 도는 데는 두 시간이 조금 넘게 걸리더군요. 순환 열차이기 때문에 특정한 종착역도 없습니다. 한눈을 팔다 내릴 역을 놓치면 꼼짝없이 한 바퀴를 더 돌아야 하니 조심해야 합니다. 낙후된 시설과 불편한 운행방식에도 버마(미얀마) 양곤 여행의 코스로 빠짐없이 추천되는 이유는 바로 버마 사람들이 여전히 애용하는 교통수단이기 때문입니다. 열차 안에서 그들의 삶을 가까이 바라볼 수 있으니까요. 




열차 내 풍경들. 시장에 내다 팔 물건들로 가득차고, 과일이나 간식거리를 직접 파는 상인도 많다. 




 버마 사람들, 특히 상인들은 승객이 아니라 마치 주인처럼 열차를 이용하는 것처럼 느껴졌습니다. 여인들은 신발을 벗고 맨발로 양반다리를 하거나 앉은뱅이 자세로 자리에 앉습니다. 편한 자세로 잠을 자거나 급하게 나오느라 놓친 몸단장을 시작합니다. 긴 머리칼을 빗질하는 여인, 도시락으로 끼니를 때우는 남성, 타나까를 볼에 쓱쓱 문지르는 어린아이까지 다양합니다. 손녀 손을 잡고 탔던 어느 할머니는 이들의 바구니에서 물건을 골라 즉석에서 사기도 했습니다. 미얀마 사람들에겐 양곤 순환열차가 이동의 수단이면서 동시에 격의 없는 장터인가 봅니다.  





 청결과 에티켓을 중요시하는 우리에게는 조금 놀라운 장면입니다. 눈살을 찌푸리게 되는 것도 자연스러울 것입니다. 저 역시 빗질로 빠진 머리카락 뭉치를 바닥에 버리는 모습이나 진흙 범벅의 맨발을 의자 위에 올리는 모습에 헉, 하는 탄식을 참지 못했으니까요. 그러나 제가 끼어든 곳은 이들의 일상이 펼쳐지는 삶의 터전이었습니다. 여행자인 저는 이 곳의 문화와 삶에 이방인인 셈이지요. 이들을 섣불리 평가하고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여행자가 신중하고 사려 깊지는 않았습니다. 저는 열차 맞은 편에 앉아있던 그런 여행자를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봐야 했지요. 단정한 폴로티셔츠에 커다란 DSLR을 목에 건 그는 영락없는 관광객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는 미국 단체 관광객들 중 한명으로 그들과 나란히 앉아가고 있었습니다. 한 버마 여성이 작은 유리병 안의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광경을 보더니, 그는 여인을 따라 하기 시작했습니다. 손가락 끝을 핥는 혀를 과도하게 내밀고 쩝쩝 소리를 크게 내며 낄낄거리는 모습에는 조롱과 멸시가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버마 여인은 관광객 무리의 웃음이 자신을 향한 것을 알아차리곤 멋쩍은 표정으로 유리병을 옷 깊숙한 곳에 도로 들여놓았습니다.   

    

 버마의 경제와 정치, 문화 수준이 선진국의 그것에 많이 뒤처지는 것은 사실입니다. 어떤 이들은 버마에 ‘미개’, ‘야만’ 같은 이름을 붙일 지도 모릅니다. 개인적인 평가를 내리는 일까지 막을 순 없겠지만 그 대상을 비난하고 조롱할 권리는 없습니다. 낯선 문화와의 만남은 인정과 존중이 기반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그것도 한 인간을 마주한 상황이라면 말이에요. 그의 무례함이 저에게는 제국주의 시대의 자만심과 우월감의 잔재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남은 여행 동안 이곳, 버마를 성급하게 판단하고 업신여기지 않게 나를 다그치는 계기가 되었구요. 

매거진의 이전글 1. 버마에 다녀왔어요 (개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